KBS의 행태로 볼 때 전국적인 수신료거부 운동이 불가피한 것 같다.
그런데 전국적인 수신료거부 운동이 가능할까 의문이 든다.
과거의 수신료거부 운동은 어느 정도나 호응이 있었을까?
과거보다는 국민의 언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언론개혁을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언소주, 진알시란 '조직된 시민단체'도 있다.
그러나 투철한 언론관을 지닌 언론관계자와 언론개혁을 꿈꾸는 조직된 시민단체에 소속된 구성원를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은
언론을 언론사라 여기며 수신료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전기세낼 때 함께 내는(전기세에 포함된) 세금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며 수신료가 무엇이고 수신료를 왜 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주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 아닐까 싶다.
우선 나부터도 이전 정권에서 수신료거부 운동이 있을 때(왜 수신료거부운동을 하는지 잘 몰랐다)수신료 거부운동을 케이블(유선)이나 위성 방송 시청료를 내고 있는데도 전기세에 합산되어(딸려) 청구되는 '수신료'란 세금이 부당하게 이중으로 청구되는 것에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항의하고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쯤으로 이해했었다.
현 정부의 미디어 정책과 KBS의 비윤리적인(정상적이지 않은) 운영행태로 볼 때 수신료거부 운동은 마땅히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국민의 동참가능성과 수신료거부 운동의 실현가능성 사이에는 국민과 언론개혁진영의(언론인의) 수준차만큼이나 괴리가 벌어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수신료란 무엇일까? 수신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주관이 있어야 국민들도 동참하지 않을까? 더 크게 수신료 문제를 넘어서 언론개혁 자체가 성공하려면 무엇이 전제되어야 할까? 이 전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구체적 방법론도 실효를 거두지 않을까 싶다.
언론이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며 삶이라 할 수 있는 아니면 삶을 지배하는 정치경제문화보다 근원적인 존재방식이며 수신료란 생활방식과 존재방식을 지탱해주는 지지기반 내지 동력이란 것에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게 할 수 있을 때, 그런 인식의 확장을 위한 노력이 선행될 때 언론개혁도 가능하지 않을까? 공영방송국의 정체성 문제, 수신료인상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요는 수신료란 무엇이고 언론이란 무엇인지를 알리는 것이 구체적 언론법의 잘잘못, 수신료인상의 부당함을 알리는 것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언론의 중요성, 수신료의 가치에 대한 명확한 판단기준이 선다면 국민들도 바른 판단을 하지 않을까?
정관精觀 바른 관점 또는 객관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주관적 능력(심안)이란 말이다. 불교 용어 정견正見과 비슷하다. 우리말 가리사니도 비슷한 뜻같다.
세상을 바로 보면 득 되는 것이 많다. 세상을 몰라 이치를 몰라 세상돌아가는 이치를 몰라 사람들에게 속고 권력에 농락당하는 것보다는
세상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 손해를 덜 볼 수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상을 바로보고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 정보 취득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도 그래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모르면 두렵고 회피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신문도 보고 학습도 하고 상담도 하고 뉴스도 보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일종의 본능이다. 모르는 만큼 손해라는 것을 우리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바른 지식, 바른 정보, 있는 그대로의 현실, 자기 안의 세계만이 아니라 자기 밖의 세계도 바라볼 줄 아는 치우치지 않는 사고, 깨닮음 성찰 이 모든 것을 위해 내는 것이 바로 바른 정보 사실 진실 진리 수신료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살기위해 누군가의 의도대로 살기위해 정보취득료를 지불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생각과 느낌으로 사유하고 스스로 식별 분간 판단하는 주체적 인간이 되기 위해 정보취득교육수신료를 내는 것이다.
수신료란 무엇일까 인터넷이나 KBS에서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스스로 고민해보았다.
내가 생각한 수신료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내야하는 정보취득세 내지 교육세 학습비 같다.
그런데 이 세금은 목숨을 전제로 내는 세금이다.
내목숨이 소중한 만큼 남의 목숨도 소중하다고 인정해서 내는 사람세다.
진실과 사실을 담보할 때만 그 가치가 인정되는 세금이기도 하다.
인간이 속지 않고 기만당하지 않도록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려
서로 오해하거나 선입견을 가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는 세금이다.
권력(공무원,부자)의 남용 횡포로 가난한 서민 시민이 기만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진실과 사실이 만연토록 하라고 내는 세금이다.
역사적 사실의 조작에 의한 인류의 분열, 비극의 반복을 더이상은 막고자 기꺼이 내는 세금이다.
인류의 경험과 지혜를 전승하는 비용이다. 경험과 지혜를 학습하는 비용이다. 경험과 지혜 즉 기록이 조작되면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을 전쟁과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또
무지몽매를 벗어난 것에 사례하는 책거리세다.
생각해보았다. 수신료를 더 많이 내어 양질의 교육프로그램과 TV프로그램(보도교양오락)을 시청하는 것과
사교육을 받거나(학원) 고가의 과금채널(유료채널)을 시청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국민에게 유리한가.
당연히 몇 천원 수신료 더 내는 것이 평생교육이나 경제적으로나 모두 더 이롭다. 사회전체의 건전한 상식제고나 국론통합(사회통합)으로 인한 개개인의 감정과 정신의 소통교감공명효과를 고려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개별적으로 정보이용료를 지급하는 것과 공영방송을 전제로 한 수신료 납부 효과를 비교해보면
가정에서 위성, 케이블,IPTV 시청료를 개별적으로 납부하는 것보다 살림에서 보나, 교육적인 측면, 산업적인 측면, 경제적인 측면, 사회문화적인 측면, 언론의 사회적 역활과 기능을 종합해보았을 때 훨씬 남는 장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정여건의 미비로 시행되지 못한 평생교육의 대체기능, 사교육비 감소, 의식수준의 제고, 소통과 네트워킹에 의한 역동적 정의사회구현, 정보와 뉴스, 각종 컨텐츠의 가치화를 통해 얻는 경제규모와 소득증가, 권력을 감시하는, 이 세상 역사를 기록하는, 골목에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소외된 현대인들의 눈과 귀, 입(목소리)이 되어 그 개별의 섬을 하나의 나라,사회 지역, 집단으로 묶는 기능, 공공서비스 등 참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시 수신료란
교육세다.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이 사회의 진실과 사실을 알 권리, 무지몽매에서 눈 뜰 권리, 속지 않을 권리, 오해받지도 하지도 않을 권리,
기만당하지 않을 권리, 알고 있는 사실이 달라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지 않을 권리, 갈라지지 않을 권리 등을 담보로 내는 세금이 아닐까? 이 정도 값어치에 치르는 대가(세금)이라면 절대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영방송국 KBS는 어떤가? 이와 정반대의 행태를 일삼고 있지 않은가?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와 피해자는 있기 마련이건만 정파적 관점에 따른 공정성시비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공영방송이 지향할 당위성(책무)이기라도 한 양 공정성 논란을 핑계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간할 수 없게 하거나 서로 뒤바꾸어 놓지 않는가
진실을 호도하고 있지 않은가?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다. 검은 것은 검다. 흰 것은 희다 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책무일진데 줄대기만 하는 곳에 정치적 모리배들만 득실 거리는 곳에 모리배들이 많드는 허위,거짓을 보자고 수신료를 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KBS나 인터넷에 나와 있는 수신료의 정의란 무었일까?
KBS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있다.
어제 밤에 꽤 길게 썼었는데 날라가고 자동완성된 글만 남아, 오늘 다시 쓰려다 다시 쓰기는 귀찮고 해고 그냥 올린다.
언론이란 것은 삶의 일부분인 동시에 생활방식이다. 언론을 말하기 전에 인간을 과학적으로 먼저 따져보면
인간이란 어떻게 보면 큰 울림통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세포와 원자가 떨리는 입자이자 파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울림통은 떨림(진동)을 가지고 있고 그 떨림을 소리로 낸다. 인간이란 울림통은 소리를 내는 존재가 아닐가 하는 것이다.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 무생물은 각각의 고유한 진동 즉 소리를 가지고 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이 군집생활을 하고(식물도 군집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소리로 의사를 교환 하는 것은
건강한 생명활동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생명력 자체를 증진시킨다. 인간이 동물이 혼자일 때보다 무리지었을 때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는 힘이 강해지는 이치는 누구나 알 수 있다. 또 과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감정과 정신을 파동(소리,울림)을 통해 교환하는 개체와 개별개체의 수명에 차이가 난다고 한다. 전문적인 과학이론은
직접 찾아보길. 내가 아는 것은 직관적인 것이고 신문이나 서적에서 읽었던 기억의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만나고 감정과 정신을 교류하고 교환하고 공유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본능인 것 같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장황한 과학이야기를 했다.
또 사회와 생태계(환경)에 속한 인간은 신앙과 종교를 가진다.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되는 이유는 진리(말씀)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절대자, 성인의 가름침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고통(한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구의 발로가 종교의 기원이 아닐까 한다. 신이 있건 없건 인간은 자연의 부분이고 불완전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인간이 갈구하는 대상은 완벽한 존재, 절대자 신이 아닐까 한다.
신은 우리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 신을 믿는 현세의 인간들을 보면 교회를 믿는 것인지 종파의 교리를 따르는 것인지 목회자에 의지하는 것인지 우상(진리가 아닌 또는 말씀이 아닌 말이나 대상)을 섬기지 말라는 신의 가름침을 이해한 것인지 회의가 든다.
이야기가 옆길로 새었는데 종교적 인간의 근본에도 말씀 즉 진리 앎의 추구 지혜의 전승 등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인간은 또 학습과 교육을 하는 존재이다. 교육에 목숨을 건 존재라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른다. 이 학습과 교육의 근본에는 불행했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으려는 확고한 인류애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불완전한 피조물이 생산한 생산물의 부족함을 메우려는 인간의 피, 땀, 노력, 시간이 있었다. 노하우의 전승또한 교육의 목적이다. 이런 교육하는 인간의 근본에는 그 사회 생명체 공동체의 유지를 갈구하려는(지속공존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간이 양심에 귀 귀 울이고 진리를 추구하고 양심과 진리에따라 표현하는 행위는 전승하는 행위가 바로 언론이다. 이런 언론을 누군가 네트워크통신기술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장악하게 되면 인류가 겪게될 불행은 그 이전 세계 불행인 신분의 제약 정치권력의 횡포에 비할 바가 아닐 것 같다. 전세계는 지금 18세기에 확보한 천부인권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과도기에 있지 않나 싶다.
바로 인간의 소통공명권의 확보가 당면한 대한민국의 절실한 과제인 것 같고 그 첫 걸음은 언론개혁이 아닐까 싶다. 더 구체적으로
깨어 있는 시민 모두가 언론이 무엇인지 수신료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주관을 가지는 것 내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파문 인과관계 순환관계 .... 문자 말 언어에 대해서도 썼었던 거 같은데
'pudal > 언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9년 2000년 즈음의 낙서-무엇이 달라졌을까? (0) | 2010.02.09 |
---|---|
역사 (0) | 2010.02.04 |
길을 막는 다는 것 - 진알시 하다가 (0) | 2010.01.08 |
이런 저런 말들 댓글들 - "나랏일이 우선… 아비 장례식엔 오지 마라" (0) | 2009.12.21 |
오늘은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0) | 2009.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