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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무엇일까? - 제 1회 언론소비자 올레 후기

pudalz 2012. 6. 11. 20:45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우주 최강의 무기의 정체는?

 

올레길을 걸으며 언론인의 외길을 머리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신 동아투위 선생님들의 안내를 들으며

진실이 무엇일까? 무엇이 반세기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선생님들을 동아일보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을까?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군부독재가 사라진 이후에도 말이죠. 동아투위의 진실은 무엇이고 진실이란 무엇이길래

자유언론과 진실을 추구한 선생님들을 길거리로 내몬 군부정권의 수장(박정희대통령)을 아직도 우상화하고,

무고한 시민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한 광주의 참극(의 진실)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 않을까?

만약 대한민국의 만백성, 시민이 모두 진실을 안다면 박정희의 기념관을 짓지도 않고

선생님들도 복직되어 잃어버린 청춘과 지난 세월 겪었던 고초를 보상받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명을 한순간에 끊는 총과 칼일까? 인명과 맞바꿀 수 있는 돈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돈의 위력은 세 살배기 아이들도 압니다. 아파도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하고, 어떤 사람에겐 하룻밤 화대나, 술값이

어떤 사람에겐 한 달이란 시간을 땀흘리고 인생의 한 순간을 바쳐야 얻을 수 있는 대가입니다.

막일을 하여 월 150만 원씩 받는 사람과 한 달에 천5백만 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월 천5백을 버는 사람은 월 150을 받는 사람보다 150만 원 버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1년이란 시간을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적은 돈이 어떤 사람에겐 인생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 돈이 인생을 샀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벌들이나 총칼로 무장한 군대와 경찰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는 더 큰 힘을 행사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경험과 느낌을 돈 주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재용이나 가난한 집안 아들이나 인생의 무게는

동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속세도 내지 않고 불법으로 삼성그룹을 상속한 이재용이라고 해서

진실에 더 다가가고 인생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런데 돈, 총과 칼, 권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동등한 목숨의 가치를 부여받은 만백성의 눈과 귀와 입을 통해 보고 느끼고 듣고 나온 목소리 같습니다.

진심의 여론입니다. 마마호환, 총칼, 돈보다 무서운 것 같습니다.

총칼이나 돈을 가진 권력자도 결국은 한 사람의 사람입니다.

만약 만인이 다 알고 모두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리 총칼, 돈을 거머져도 국민의 뜻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나혼자만이 총칼과 돈을 가지고 잘났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결국 그 사람의 명령을 받는 총칼과 돈을 가진 사람도 눈 귀 입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국민에게 좌절감만 안겨준 통합진보당 사태, 대한민국의 진실을 시멘트로 발라버린 이명박 대통령의 삽질,

선출되지 않는 세습권력의 횡포, 기업가의 전횡, 국가간의 전쟁. 집안싸움...

세상엔 참 마음에 들지 않고 억울한 일, 불행한 일, 비극, 참사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엔 슬픔과 노여움 불행만 있지 않고 기쁨도 즐거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슬픔과 기쁨의 근본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연과도 더불어 살아야 하고 동류인 인간과도 공존과 존속을 도모해야 합니다.
날 때부터 사회(공동체무리)에 던져졌습니다.

그래서 이미 날 때부터 인간유전자 속에 제 목숨을 보존하려는 이기적 유전자와
역사공동체란 사회적(공존적) 문화유전자가 함께 유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이웃과도 다투고 혈족과도 다투고 이웃나라와도 다투고 시비를 가리게 됩니다.

갈등과 대립이 있을 때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이기적 유전자의 본능만 따르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항상 싸우고만 살지는 않습니다. 싸우고 토론하고 설득하는 중에 상대방의 진심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진심을 알고 나면 더이상 싸우지 않습니다. 이런 개인적 진심이 사회로 확장되면 진실이 됩니다.

즉 진실이란 여럿, 공동의 진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돈, 총칼, 권력을 가진 자는 이 공동의 진심, 시민의 정치 경제적 욕구, 의사가

사회에 알려지거나, 반영되거나 통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통하거나 알려지면 돈, 총칼, 권력보다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 총칼, 권력, 언론을 동원해 만인의 눈과 귀와 입을 가리고 막습니다.

인간 사이에 있는 존재하는 미디어와 사람은 이때 사람의 눈과 귀와 입을 가리고 막는 수단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이 미디어가 스스로 돈과 총칼 권력을 동원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습니다.

음악을 듣는 데도 돈이 듭니다. 사회성을 체득하는 학습에도 돈이 듭니다.

그렇다고 내가 쓴 돈이(울며 겨자먹기로 빼앗긴 돈- 개념을 습득하여 의사소통하는 사회적 비용)

축척된 지식을 전수하는 선생님, 장인, 새로운 기술과 예술을 창작한 창작자에게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미디어자본기업 자체가 만인이 땀흘려 번, 인생을 바친 소득을 강탈하는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와 같은 세습과점신문들,

문화일보 한국경제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와 같은 대기업 산하의 방송 신문 통신사들,

세계일보 국민일보 PBC CBS 불교TV 와 같은 종교 신문 방송 라디오들이 그들입니다.

(자본의소유와 언론의자유의 실현에 종교언론들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종교언론의 소득원 수익원은 공적, 간접지원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즉 불투명한 소득원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사옥들이 엄청 크지요. 만약 세계일보나 국민일보가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한다면 유지가 가능할까요?

종교방송이 지원 없이 유지가 가능할까요? 지원을 받았으면 그에 합당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해야겠지요?

과연 공익적 언론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자사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면 부풀리고 은폐하는 중앙일보의 행태와 다를까요?)

 

이런 미디어과점의 흐름과 사적이익집단을 통칭해 새로운 경향, 조류란 뜻으로

과점을 상징하는 조중동 뒤에 "류"를 붙여" 조중동류" 언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들은 사립대학 사립학교도 과점하고 있습니다.

광역권 케이블방송사업자도 CJ, 멕쿼리 태광과 같은 몇몇 대기업들에 의해 분할되고 있습니다.

각 지역의 민영, 공영 지상파 방송국들도 그 소유주는 대부분 건설사업자와 같은 대자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재산,부동산만 늘려가는 사학집단들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진심과 진실을 농단하고 인간의 경제생활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조중동은 발행부수를 속여 광고료를 뻥튀기 한 후 기업에 전가하고

기업은 자기 기업의 미화를 대가로 물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에게 광고료를 물려

합법적으로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갈취해 가고 있습니다.)

 

 

진실이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면서 세상의 아픔과 비극을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약 같습니다.

권력이 제아무리 높다한들 진실아래 뫼이로다 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실은 씨앗과 같아 광주항쟁의 은폐에서 보듯이 한 번 묻히면 그 씨앗을 티우기 위해 무수한 희생을 감수하게 만들고

진실은 불완전하고 부족한 한계를 안고 있는 인간에게 묘약과도 같아 그 진실이 밝혀지면

썩어가고 문드러지던 곳도 아물고 낫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지역과 이념을 넘어 화해하게 합니다.

광주의 진실을 불덩이처럼 안고 있다 그 불덩이에 속이 새까맣게 타고

제 손이 데일 것을 알면서도 불덩이를 잡아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지고

인간의 양심을 괴롭히는 진실을 밝힌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만큼 자유와 정의 평등 평화라는

만인의 보편적 진실을 누리고 추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회원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오늘날 언론은 갈라지고 떨어진 인간을 잇는 다리, 인간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

편견과 선입견의 피해를 입는 소수자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치료제도,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도 아닌 사회적 흉기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놓고, 진실이나 뿌리나 본질 연원을 캐기보다는

피상적이고 말초적인 것으로 돈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험난한 세상 사이사이에 단절된 사람이 동류로 서로를 확인하고 믿고 살 수 있도록

언론을 국민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권력이 국가사회의 재원이 투입되는 언론사를 전횡하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나간 일을 알면 앞일도 알 것 같습니다. 친일 매국 반사회적 반역사적 곡필을 자행한 이들의 행적과 이들에 대항해,

성유보 선생님 말처럼 모든 자유의 근본이 되는 자유, 진실을 알릴 자유를 위해

투쟁하셨던 길을 따라 걸어감이 그래서 더 소중한 것 같습니다.

역사란 다수, 여럿 공동체의 인생이고 공동체가 만드는 삶이니까요.

역사의 길이 진실의 길이고 진실의 길이 진심이 통하는 길입니다.

민주, 평화, 통일, 자유, 평등, 정의 인간의 존엄 ...모두 역사의 길 인간의 길 인간이 걸어가야 하는 길 같습니다.

 

경제생활의 보편적 상식이랄 수 있는 금산분리, 금언분리의 경계가 무너진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사회 현안으로등장한 경제민주화문제 복지 같은 언론 이외의 문제도 더 큰 문제도 있을 텐데요, 저는 경제이론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종교언론교육 권력의 해악보다 더 큰 경제체제나 자본주의의 맹점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습니다. 경제문제와 관련해선 신문방송의 지면, 토론 프로그램 보면 훌륭한 선생님들이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시드라고요. 아마 서로 서로 떨어져있거나 다른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