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dal/환경

쓰잘데기 없는 단상들

pudalz 2008. 11. 14. 12:06

매일 언론관련 집회다 세미나다 강좌다 밖으로 쏘다니다 보니 집에서 밥 먹을 일이 별로 없다.

아침에 배달 끝내고 나니 배는 고픈데 라면은 지겹고 어떻게 아침을 해결해야 할지 잠시 공황상태에 빠졌다. 

해먹자니 드는 시간이 아깝고 번거로워, 댓바람부터 어디 싸고 근사한 곳 없나 하고 동네를 한바퀴 돌았지만

막상 나가보니 먹고 싶은 것이 없다. 이왕 사먹는 거면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것으로 먹고 싶은데, 

가격이 비싸든지 반찬이 부실해서 마땅치가 않았다. 혼자 살다보니 뭘 사먹을 땐 영양도 고려한다.

좋아하는 설렁탕은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가 수입되어 영 미덥지가 않고 동태탕이나 순대국은 맨 반찬이 깍두기와 김치 달랑 두개다.

짜장면도 마찬가지다. 내가 자주 가는 3000원 짜리 해장국 집도 반찬은 깍두기와 김치뿐 이다. 

주로 싸서 순대국, 짜장면, 돌솥비빔밥을 사 먹는다. 그래도 매일 먹다 보니 질린다.

 

그래서 오늘 아침엔 시장에서 양념돼지갈비 1근(4000원), 상추 (1000원) 콩나물 (1000원), 김 (1000원) 을 샀다.

밥하고 콩나물국 끓이고 상추씻고 돼지갈비 구워 한끼 해결하는 사이 어느새 11시다. 

양념갈비는 수입산이라는데 들쩍지근하고 갈비가 많아 별로 였다.

밥상을 차리고 먹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밥 한번 먹기가 어지간히 어렵구나.

학실히 음식은 바로 해서 먹거나 제철에 나는 음식이 맛있는 것 같다.

먹는 것을 사먹다 보니 재료가 있어도 해먹는 방법을 까먹고 (배고픔이 해결되는) 과정의 의미조차 망각해버리게 되는구나 하는 따위의 생각이었다. 아마 생활에서 먹는 것 싸는 것 자는 것을 빼고 나면 머가 남을까? 일하고 먹고 싸고 잘 수 있으면 충분한 것 아닌가? 그렇게 바라는 것이 많지 않다. 물론 많은 것이 충족되었기에 하는 말일 수도 또는 남들에겐 부족하게 보일 수도 있다. 사지가 멀쩡하다든지, 열등감과 같은커다란 심리적 장애가 없는 것은 다행한 일이고, 나는 괜찮지만 나이 40에 개뿔도 직업도 가정도 없는 것은 타인에게 한심하게 비춰질 수 있는 요인이다.

 

음식의 풍미, 맛의 조건

수입산의  풍미가 국산보다 떨어지는 이유는 유통기간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돼지고기의 질은 둘째 문제 같다. 국산농축수산식품은 청과물과 함께 유통이 바로바로 이뤄지기 때문에 음식이 바로 해서 먹을 때 맛있듯이 수입산 보다 요리를 하면 맛이 있는 것 같다. 신선함이 맛을 좌우하고 맛은 영양의 기준이 되고 영양이 건강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만들어진 제품을 먹어서 생기는 사고

밥 한번 먹는데 많은 시간과 노고가 들어가듯이 새삼 세상 모든 일이 가벼이 여길 만한 것이 없고 쉽게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려워만 하고 두려워서 끙끙 앓고만 있다간 자칫 굶어죽기 십상이다. 

하나 하나 숙제를 풀어가는 과정 그 자체가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고,

그러한 깨달음의 마디 마다가 성장의 결실이었는데

때론 게으르고 두려워서, 때론 생활환경(먹는환경)에서 생긴 습관때문에 그러한 과정의 의미를 망각하고 살게 된건 아닐까?

먹는 것을 사서 먹다보니 일상의 다른 일들에서조차 과정의 소중함을 잊게 되었다. 먹으면 싸는 것은 당연하고 자는 것을 살 수는 없잖은가?

식사라는 것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그래서 냉장고에 달걀, 카레, 김치, 미수가룻, 라면, 미역, 무우, 감자, 등이 있어도 있다는 것도, 해먹는 방법도 모두 잊어버렸다.

땅이 있어도 경작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즉 재료가 있어도 요리 비법을 아는 요리사가 없다.

종국에는 경작할 사람도 문화도 사라질 것이다.

재료와 먹는 행위 즉 요리과정 속에 생명의 정신과 얼이 배어있다.

정신과 문화의 모태가 되는 식품과 요리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돈만 많으면, 돈으로 수입하면 된다는 시장 만능주의 속에 삶의 곤란(건강의 위협), 철학의 빈곤이란 지뢰가 숨어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먹을 거리와 먹는 짓은 삶을 지배한다. 'what u eat what u are 어떤 것을 먹고 자랐느냐가 그 사람의 품성을 대변한다' 는

외국말처럼 식량의 자급 및 확보, 식품의 안정성 문제에 대해 문명과 삶의 본질을 꿰뚫는 성찰이 부족했다

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

 

식량, 요리문화를 화폐로 환산하는 것만큼 어리 석은 것이 없고 환산하려면  줄기세포같은 의약특허나 지적재산의 가치를 산정하듯이

잠재가치로 따지자.   음식을 장만하는 행위와 망각에 대해 무엇이 망각을 부르는지.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이 되는지

재산을 잃는 것은 건강을 잃는 것보다 약소한 것이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일까? 잘 먹고 안 아픈 것이 아파서 치료하는 데 드는 기회비용보다 싸다. 무엇을 먹느냐? 먹는 것이 전부인가? 먹기위해 사는가? 안 먹으면 죽는다. 그러나 선조들은 먹는 것보다 옳곧은 정신에 더 가치를 두었다. 먹는 것 이상의 생의 의미를 찾았다. 배곪음에서 오는 구속보다 생명의 이상, 공동체의 이상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빵때문에 서로를 해치는 인간의 숙명을 극복하려 하였다. 빵을 초월한 함께 공존공유공감하는 이상을 생각했다.

먹는 것에 구속되는 것도 어리석고 먹는 것을 가벼이 여김도 어리석고 인생의 의미를 빵에만 두는 것도 어리석다. 밥이 없으면 죽지만 함께 살기 위해선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생각도 하고 살아야 한다. 화폐로 디지털로 수치화되는 가치와 질량도 있지만 수치화되지 않는 가치와 물질량도 있다. 이 사이의 간격과 경계는 모호하다. 하나의 표현법, 수치, 사고에 쏠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정신과 물질,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경계는(물리량은) 배제배척배타적이지 않고 일치하기때문이다. 결국 임어당이 살던 시대나 현대나 인간의 깨달음의 수준은 차이가 없다.

 *기회비용=잠재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