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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홍세화칼럼] 파시즘의 유령-한겨례

pudalz 2008. 8. 25. 18:02

기사를 무단 펌[스크랩]하며

저작권을 무단 게제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을 알지만 현재의 미디어 보도환경을 고려할 때 진실하고 사실에 입각한 정보가 부족하다.

대안매체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려면 훌륭한 기사, 바른 기사가 더욱 노출되고 그런 저작물을 생산하는 매체가 두각되어야 한다.

신문산업에서 경향 한겨레의 점유율이  10%가 되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아직은 더 기사를 통해 매체의 차별성을 알릴 필요가 절실한 상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댄스와 발라드가 주종을 이루던 음악시장이  Rock, R&B, 불루스, 재즈, 힙합, 월드뮤직 등 다양한 음원의 보급을 통해 질정성장과 음원수익시장확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았으면 한다. 오랜 음반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현재 음원의 2.3차 저작권유통산업의 등장으로 오히려 음원수입이 다양해지고  듣는수준과 창작수준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음악산업 전체의 경쟁력이 글로벌화 된 것이다.(*사족: 창작자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여전히 적다. 유통권자(2차저작권자)가 90%를 가져간다)

미디어 산업의 구조적 발전을 위해 나의 무단 스크랩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신문은 아직 베이비 걸음마 수준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참이냐 거짓이냐가 우리나라 신문기사의 수준을 가름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 신문산업의 현실이고 그것은 구조적 부실에 기인하며

구조적 부실은 참언론, 바른 매체의 성장과 유통구조의 혁신을 통해 유통독과점을 막고 아울러 여론 독과점에도 제동을 걸 때 바로 잡을 수 있기때문이다. 참과 거짓을 넘어선 신문산업 종사자와 그 종사자가 내놓는 컨텐츠가 boyond the sea하기를 바다 건너의 이국매체와 경쟁할 수준에 당도하길 바라며... 이것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국가는 인간의 자연적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국민주권과 헌법으로 보장된 나의 인권 즉 기본권, 지본권 중에서도 언론출판자유(사상표현자유)를 쟁취하기위한 구차한 변명이다.

 

 

 

 

 

» 홍세화 기획위원
점입가경이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정정길 대통령실장,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유재천 한국방송 이사장이 비밀회동을 했다. 새 <한국방송> 사장의 충성심을 점검하려고 했을까, 사장 응모 예상자들도 동석했다. 그들은 “대책회의를 한 게 아니라 방송 현안에 관해 논의했다”거나 “듣기만 했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뻔뻔함에는 그들의 방송장악 의지처럼 일말의 주저나 막힘이 없다. 항상 그렇듯이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이런 반민주적 행태를 비판하는 대신 정치공학의 틀 속에 녹여 없애려고 꾀할 뿐이다.

“뻔뻔해도 지배한다”에 머물지 않고 “뻔뻔해야 지배한다.” 이명박 시대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뻔뻔함이 지배세력의 유일한 자질이 된 것은 정의와 상식, 공공성을 요구하는 건강한 시민의식에 의한 비판과 견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촛불 국면에서 이명박 대통령 지지도가 7%까지 떨어졌을 때조차도 한나라당 지지도는 30%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생각을 갖고 태어나진 않는다.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생각을 갖게 되고 그 생각을 고집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그 생각이 어떻게 자기 것이 되었는지 물을 줄 아는 인문적 소양을 가진 구성원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어 10 대 90의 사회로 치달아도 ‘90’의 생각을 ‘10’이 쉽게 지배함으로써 관철되고, 민주주의 제도는 과두지배를 가려주는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세력이 교육과 미디어를 의식 지배에 동원하는 것은 물론이다. 교육과 미디어 이외에 종교와 지역의식이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다.

가령 한나라당이 차떼기 전력의 부패 정당이고 아이엠에프를 불러온 무능 정당이었음에도 항상 30% 이상의 지지를 확보하고 좀처럼 제1당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은 왜일까? ‘조중동’의 활약상이 크다는 점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 위에 교육과 종교와 지역의식이 사회구성원들에게 사회비판과 견제력을 갖게 하기보다 지배세력에 동조하거나 복종하도록 작용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아직 파시즘으로 치닫지 않을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민주화운동의 열매로서 공영방송이 최소한의 정의와 상식과 공공성을 담보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마저 무너진다면 이미 닥치고 있는 경기 침체 상황과 만나면서 파시즘의 길이 열릴 위험이 높은 게 아닐까.

미디어재벌 베를루스코니가 지배하면서 이탈리아 민주주의가 한 세대 후퇴했다고 말하는가 하면, 사르코지는 프랑스의 미디어 재벌의 동반자이며 대리인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이처럼 미디어는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며 장치다. 그런데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지역이 의식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고, 특히 교육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는 점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네 교육은 ‘평정’된 채로다. ‘반전교조’ 네거티브 전략으로 서울시교육감을 차지한 뒤로는 더욱 더 거칠 것이 없어졌다. 지역패권주의는 아직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았고, 촛불 동력이 떨어지면서 조중동이 반격에 나섰다. 교회는 이명박 장로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공격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제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이 평정된다면 파시즘의 길에 막힘이 없는 게 아닐까? 우리가 베이징 올림픽 메달에 넋 놓은 사이 파시즘이라는 유령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는지 모른다.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