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법.
한국방송 사장 시절 배임 혐의에 대해 12일 최종 무죄판결을 받은 정연주 전 사장에 대한 보도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든다. 정사장 몰아내기의 주요 책임자 중 한명으로 지목되고 있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무죄판결과 관련해 “인간적으로 죄송하게 생각한다”면서도 사퇴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는 소식 때문이다. 과거 최 위원장은 정 전 사장이 무죄를 받으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두차례나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고도 “심리적 고통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축하”하지만, '책임'에 대하여는 검토해 보아야 한단다. 대단한 사람이다.
학업에 열중하던 최시중의 아들을 강간범으로 지목하여 체포되게 하고, 그가 수년간 재판에 시달리며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무죄 판결을 얻어내자 "인간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축하한다"는 말을 남긴 사람이 있다 하자. 고결한 최시중은 "뒤늦게나마 과오를 반성하고 축하해 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한다"고 할까? 더구나 재판 도중에 아들이 강간은 커녕 그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완벽히 입증되었다 치자, 그럼에도 고소인은 "확정 판결이 나면 책임지겠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자, 이제 책임지라 말하니 "검토해 보겠다"고 답한다. 어떤 생각이 들까?
역시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워야 한다 생각하지 않겠나? 눈에서 불꽃이 튀고 마음에서 천불이 나지 않겠나? 아니, 평범한 이들과 다른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시니 그럴 리 없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강간 고소와 방통위원장의 몰아내기는 본질적으로 다르니 비유가 잘못되었다며 다시 눈을 부라릴텐가?
아랫사람들에게는 그토록 '공직자의 품위'와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보여준 이중적 태도는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 진행 당시의 국무총리실장 권태신.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자신이 총괄하던 세종시 법안을 놓고, 정권이 바뀌자 ‘사회주의적’이라며 색깔론까지 갖다대고 법안 폐기에 앞장서던 사람.
완전히 표변한 태도에 어리둥절하여 과거의 행적을 묻는 이들에게 그는, 참여정부 재직시엔 "행정부처 이전이 끝날 때쯤이면 공무원을 안 할 테니까 ‘나는 모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는 명언을 남긴 사람이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영혼에 대한 정리는 이 정도로 하고.
민간인 사찰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총리실은 자체조사 결과 불법사실이 확인되었다며 관련 사건을 검찰에 수사의뢰한다. 그 후 검찰 수사를 통해 사찰사실이 확인되어 당사자들이 구속 기소된 후 열린 국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 업무 내용을 권태신 총리실장과 정운찬 총리가 직접 보고를 받지 않았더라도 지휘감독의 책임이 있다"며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씨를 2년여 세월 동안 지옥 같은 공포에 몰아넣은 것에 대해 총리와 총리실장이 사과하는 게 맞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한 의원이 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의원은 "권태신 증인께 (사과할) 기회를 드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권 전 실장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해 불법조사를 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지금 검찰 수사가 끝나고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개인적으로 답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재판 진행 중'임을 이유로 사실상 사과를 거부한 것이다. 다른 의원의 질의에 대해서도 권 전 실장은 같은 내용의 답변을 되풀이 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는 것’과 ‘재판 진행 중’이라는 말 사이엔 대체 어떤 문제가 있기에 그는 사과하는 것조차 그렇게 힘들었을까?
대체 이것들은 어떤 악행에도 ‘확정 판결’ 전에는 사과를 못하고 확정판결이 나면 책임지겠다고 우기다, 막상 그렇게 고대하던 ‘확정 판결’이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말을 바꾼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 헌법은 공직자들에게 ‘확정 판결 전에는 사과도 하지 않을 권리’를 부여한 것인가. 스스로 조사한 결과 불법을 확인하여 수사의뢰했다는 자가 사과는 할 수 없다고 버티는 걸 과연 어떤 짐승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것 조차도 인간이 고안해 낸 ‘3심제’를 존중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끄덕거릴까?
결국 나는 과거와 오늘의 뉴스에서 다시 인간의 사악함을 본다. 아무리 품위있는 표현을 찾으려 해도 도저히 다른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이렇듯 법 이전에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도리를 갖추지 못한 공직자가 있는 나라는 그래서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 소행을 그저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국민은 격심한 분노와 스트레스 속에 법과 법치주의에 대한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러지 말라고 우리 헌법은 공무원을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하고 일정한 기준을 통해 선발한 다음, 그 신분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국격'엔 그 나라 공무원의 품격이 당연히 포함된다. 대체 이 정부가 늘 주워섬기는 ‘국격’이란 놈은 어디로 도망쳤을까?
이렇게 갖은 궤변을 앞세워 당연한 사과조차 거부하는 불한당들이 아랫사람들에게 강조하는 공직자의 품위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의 머리 속에 가득 담긴 그 알량하고 위선적인 품위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시 고통을 받아야 할까?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말도 있지만, 단연코 이 말조차 이들에겐 사치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틀린 표현이다. 사악한 공직자에겐, ‘동물과 사람의 차이’인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영혼의 조악성과 저열성’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뿐이다. 절대 잊지 말고 두고두고 물어야 한다.
과거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을 몰아가며 조중동은 그에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 했다. 대체 이들이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오늘 어떤 것인가? 나는 눈빛 맑은 아이들에게 대체 무엇으로 부끄러움을 설명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