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릴레이 농성 김광호 씨, 해방전후 가족사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 고스란히
[미디어오늘 허완 기자 ]
60, 70세를 훌쩍 넘긴 어르신들이 단식 투쟁에 나섰다. "역사가 거꾸로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나섰다. 어르신들은 2일부터 하루씩 '릴레이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KBS의 이승만 특집다큐 제작 및 방영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3일 오후, KBS 본관 앞을 찾았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잔뜩 찌푸린 하늘에도 아랑곳없이 김광호(59) '6.25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진상규명 전국유족회' 상임대표가 천막에 들어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아들 김창규(30) 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 대표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두 시간이 넘도록 속에 쌓여있던 분노와 한을 쉬지 않고 토해냈다. "공영방송에서 이승만을 미화하는 방송을 버젓이 준비하고 있는 이 나라가 대체 어떤 나라냐"며 울분을 토하는 그의 목소리는 굵고 또렷했다. 그가 들려준 가족사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이자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었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앞에서 '친일독재 찬양방송저지 비상대책위원회'의 독립유공자후손 등 20여명은 이승만찬양방송을 그만두라며 1일 릴레이 단식농성을 시작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
김 대표의 조부 김정태(1898~1950) 씨는 약관 19세의 나이로 김해 지역의 3·1운동을 이끌었다. 밤새 태극기를 손수 그려 군중들에게 나눠줘가며 독립운동을 주도한 죄로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대구 복심법원에서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해방 이후 친일·우익과 민족주의·좌익 세력으로 나뉘어 치러진 3·1절 기념행사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민족주의·좌익 쪽에 섰다. 김 대표는 "조부는 이승만이 버티고 있는 친일·우익 쪽에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으셨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일로 지역 우익들의 미움을 받은 김 씨는 6·25전쟁 발발 이후 전국적으로 시작된 '보도연맹원 검속'에 휩쓸려 우익 청년들에게 처형을 당했다.
김광호 전국 유족회 상임대표. ⓒ허완 기자 | ||
그러나 이듬해 5·16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김 씨의 공로는 순식간에 '범죄'로 둔갑했다. 5·16이후 급조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특수반국가행위)를 위반했다는 혐의가 씌어졌다. 김 씨가 발굴한 유해 중에 '보도연맹에 연루된 빨갱이가 있다'는 이유였다. 김 씨는 남산으로 끌려가 '북한의 돈을 받아 유해를 발굴했다고 증언하라'는 회유를 거부한 죄로 온갖 고문을 당했다. 혁명재판(군사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고, 김 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7개월을 복역하고 나왔다. 김 대표는 "부친이 42세에 풀려나셔서 82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밤마다 '살려 달라', '그만 좀 때려라'고 비명을 지르셨다"고 전했다. 끔찍한 고문의 후유증이었다. 김 씨는 출소 이후 부친(김 대표의 증조부)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고, 다른 희생자들이 억울함을 풀 수 있도록 백방으로 뛰었다. 그 결과 그의 부친 고 김정태 씨는 1990년에 이르러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김 씨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진실화해위법'이 국회를 통과하던 2005년 12월 1일 숨을 거뒀다.
이후 명예회복을 위해 과거사 재심이 시작됐지만, 검찰은 김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고등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2010년 12월 항소했다. 김 대표는 "담당 검사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지난주(7월 28일)에 나온 대법원 최종 판결은 무죄였다. 김 대표는 법정에서 한 맺힌 눈물을 흘렸다. 담당 판사는 이례적으로 법정에서 그가 마음껏 울 수 있게 내버려 뒀다.
김 대표는 "이승만은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인물인데, 어떻게 그를 미화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이승만은 친미행위로 인해 임시정부에서도 축출된 인물"이라며 "이승만을 미화시키면 4·19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명예는 뭐가 되느냐"고 말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이름 없이 죽어간 그 많은 사람들이 지하에서 통곡하지 않겠느냐"고, "이것(이승만 특집다큐 반대)은 산 자의 의무"라고 말하는 그의 눈은 어느새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김 대표는 "대한민국의 적통을 부정하는 보수 우익들이 이승만을 내세워가며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며 "방송을 막는 것은 역사를 기억하는 자들의 소명이자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공영방송 KBS는 이승만 특집다큐 제작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면서 "단식을 해서 방송을 막을 수만 있다면 한 달이라도 하겠다"고 말했다. 짙은 눈썹과 유난히 큰 귀, 굵은 목소리를 가진 김 대표의 결연한 표정에서 기구했던 운명과 무거웠던 세월, 그리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오늘'에 대한 분노가 묻어났다.
지난 2일 단식농성이 시작되자 영등포경찰서 경비과장은 농성용 천막을 강제철거하겠다며 선무방송으로 고령의 독립유공자후손들을 겁박해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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