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dal/환경

문수스님 49제 - 문수 스님 행적

pudalz 2010. 7. 19. 23:35

소신(공양)비구 문수 사십구제

 

문수 스님 행적

1986년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出家)하여 88년 해인사 승가대학 수학,

94년 중앙승가대 입학 총학생회장 역임하며 학내문제 개혁과 사회문제 해결에 노력

졸업후 통토사,두방사,해인사,묘관음사선원 등을 운수하며 용맹정진함.

자신의 수행에 철저하면서도 시대적 요청에는 그 누구보다 앞서 실천하는 수행자였다 함.

2006년부터 이듬해까지 청도 대산사 주지를 맡았다 곧바로 소임을 내려놓고 군위 지보사에 주석하면서 수행에만 전념함

지난 3년간 두문불출하며 무문관 생활

2010년 5월 31(월) 오후 3시경, 군위군 사직리 하천 제방에서

 

이명박 정권은 4대강 공사를 즉각 중지 폐기하라.

이병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는 유서를 남기고 소신공양을 결행, 세납 49세(법랍 25년)로 입적함.

 

입적당시

손을 부처님 모습처럼 올린 상태로 마지막 순간까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전해짐.

우리 나라  최초의 등신불이 되셨다 함. 고통받는 뭇생명과 가난하고 소외된 중생의 아픔을

온 몸을 사르는 소신공양으로 대신함. - 문수스님 소신공양 추모위원회 행적부분 요약

 

신도를 제외한 비신도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봉은사 명진스님에 대한 총무원장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제 시청광장에서 국민추모제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수스님의 입적소식을 캠프에서 처음 듣고 등신불(等身佛)이 생각났었다. 허나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서 재빠르게 선거에 이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님의 입적사실을 선거홍보에 쓰지 못하도록 했다. 유서와 사건의 전후가 밝혀진 이후에는

스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 바람직했지만.

등신불의 이야기가 생각나진 않지만

김동리(金東里)가 1961년 11월 《사상계(思想界)》101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등신불에 나오는

만적스님처럼 등신불이 되신 것 같다. 김동리는 매국노로

지탄받는 인물이지만 교과서에선가 등신불을 읽었을 때는 무척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49제 봉행식- 보리수 나무 아래서 석가의 설법을 듣는 중생들처럼

 

 부처님상은 무슨 생각이실까?

 조계사 경내 불교역사박물관 및 나무갤러리에 전시중인 격암 스님의 그림 중에서- 남쪽이 뭉뚝하게 그려져 있다. 남북이 하나가 되길 바라지 않는 국민이 없고 온생명의 평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MB치하의 우리나라는 점점 더 갈라지고 점점 위태로워진다.

 

 

 

 

문수스님의 비원과  조계사 한강선원 천막 해석

 

언제부터 인가

중생구제하면 너 한 몸이나 잘 건사하세요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살아서 중생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한 생이 삶이 아니라 죄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뭇 생명이 서로서로 보필하고 보완하여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루어져(나고죽고 순환하고) 있기에

내 한 몸 잘 건사하는 것은 어찌보면 애초부터 언어도단이다.

내 욕심이 내 욕심이 아닌 것이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야

너나 나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살고자 하는 욕망이

남과 타인 세계를 해하자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욕심과 발심 욕망이 있어 생명이 생명으로 존재하고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거니와 남,타인,세계를 해하는 것은

욕심 때문이 아니라 있는 세상을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바로볼 수 없는

인간의 부족함 때문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교육이념과 종교의 가르침은

언제나 공동의 선, 진리만을 가르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아이와 제자를 가르치는데 대가를 바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그저 미욱하고 몰라서 집착하고 오욕칠정에서 헤어나지 못할 뿐이다.

나무가 있어 숨쉬고 볕, 땅,물이 있어 나무가 자란다.

욕망 욕심 발심이 다 나쁜 것이 아니고 미욱하고 집착하는 인간의 부족함과 썩여

다른 생명을 고의로 해하는 욕심 탐욕이 나쁜 것이다.

생명을 날 때부터 소리로 파문을 내고 물결을 이루며 서로 서로 간섭하며 통하도록(사랑하도록) 되어 있다.

스님과 교인들이 들이는 기도란 가상의 존재에게 소원을 이루어달라는 공염불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생명의 소리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간절히 느끼며 사는 것이다.

흩어졌다 검어졌다 부서지는 구름같은 중생의 신세를 아파하고 구제하려는 자세는

처음부터 진리인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며 깨어있는 것이기에.

또한 그 것이 그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살고자 하는 욕망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