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오PD, 저를 아십니까? | ||||||||||||||||||||
뉴라이트 드라마 제작 앞둔 장기오 PD께 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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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전국연합이 한국현대사(1945년 해방~이명박정권 탄생)를 재조명하는 제작비 300억 규모의 100부작 다큐드라마 <남산위의 저 소나무>(가제)를 만든다고 한다. 그리 놀랍지는 않다. 이미 지난 칼럼(<강동순 녹취록 10대 예언>)을 통해 “보수적인 역사의 픽션화”가 진행될 것임을 예상한 바 있다. “대중적 기억을 상대로 방송을 무대화하며 치열한 좌와 우의 기억의 정치가 진행될 것”은 상식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간단히 바다 건너 일본만 살펴봐도 그렇다. 거대여당의 장기집권(자민당)과 미니야당(민주당)의 영구화, 그로부터 비롯하는 (만화, 영화, 드라마 등에서의) 우경화된 역사 해석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처럼 보인다.
장기오 대PD와의 인연 장기오 대PD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개인적인 인연도 있다. 언젠가 그의 작품의 시사회 자리에 갈 기회가 있었다. 2006년이었고 작품은 유익서의 소설 <새남소리>를 원작으로 하는 <KBS HD TV 문학관-노래여, 마지막 노래여>였다. 한국의 아름다운 사계를 숨막힐 정도로 무서운 집념과 끈기로 아름답게 영상화한 작품이었다. 근대화·현대화 속에 사라져가는 전통 소리꾼의 숙명을 담담히 그렸다. 그 속에서 방송생활을 정리하는 장기오 대PD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내가 드라마에서 이런 소재를 다루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연합뉴스 , ‘TV문학관’ 수려한 영상으로 소리꾼의 운명적인 삶 다뤄 , 2006년 2월 28일) 그러다 우연히 장기오 대PD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필자가 다니는 학교의 야간대학원에 재학중이었던 것이다. 시사회에서 잠깐 스친 인연을 소중히 기억해주었고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의 DVD까지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새파란 젊은이를 친절히 대해주었고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을 잃지 않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언제부턴가 학교에서 볼 수 없었는데, 그 때 그가 우수한 논문과 함께 졸업했음을 알았다. 올해에는 수필집을 썼다는 소식도 지면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대체로 내가 느낀 장기오 PD는 문학을 사랑하는 순수함이 삶에서도 일관적인 분이었다. 그랬던 그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이 최근이다. 뉴라이트 역사다큐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 말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뉴라이트에 장기오 PD의 이름이 함께 거론됨이 마뜩치 않았다. 물론 아직 기획단계에 있는 드라마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적절치 않음을 안다. 허나, 너무나도 생경한 소식에 도대체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응당 문화 연구자로서도 그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저명한 문화연구자 스튜어트 홀은 말했다. “일상적 생산 공정, 역사적으로 정의되는 기술적 숙련도, 전문 직업 이데올로기, 제도적 지식, 정의와 가정, 수용자에 관한 가정 등등에 관해 실제 사용되고 있는 지식이 이 생산 구조를 통해 프로그램 구성 방식의 틀을 정하게 된다… 이들(텔레비전 생산구조)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 문화적, 정치적 구조 내의 다른 소스나 다른 담론 구성체로부터 소재나 처리 방법, 의제, 사건, 인력, 수용자의 이미지, ‘상황의 정의’ 따위를 끌어온다.”(스튜어트 홀(1980/1996), 기호화와 기호해독, 한나래, p.290) 요는, 작가주의 PD로서의 그의 궤적과 그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배경을 꿰뚫어보아야 한다는 이야기겠다. 무엇이 그를 비상식적인 뉴라이트와 함께 하도록 만들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말이다.
장기오 PD의 정치색, 순수의 무채색에서 유채색으로 그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니 여러 기사와 그가 직접 쓴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우선 올해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를 출판하고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조선일보>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은퇴하고 나니까, 딱 1편 빼곤 저에게 연출 의뢰가 들어오지 않더군요. 고리타분한 문예물 만들던 PD에게 누가 제작비를 대겠으며, 몸값 비싼 인기 탤런트들이나 잘 나가는 방송작가들이 제게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작품을 같이 하려고 하겠어요? 그래서 수필가로 나서기로 했지요”(조선일보, [박해현 기자의 컬처 메일] TV문학관 PD가 글쟁이로 나선 까닭은, 2008년 7월 14일) 그가 2004년에 은퇴했으니 그 딱 한 편은 아마도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인 것 같다. 현장에서 반평생 이상 보낸 장인에게 은퇴는 참을 수 없는 고역이었으리라. 피 끓는 창작열을 식힐 수 없었으리라. 차가워진 주변의 시선도 부담되었을 것 같다. 그랬던 그에게 수필은 새로운 출구였겠다. <TV 문학관>을 통해 순수 문학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바쳤던 그였다. 뒤늦은 등단은 그 연장선처럼 보였다.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에서도 “나는 수필이 가장 순수한 문학 장르임을 확신한다.”(장기오(2008),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도서출판 이유, p.7)고 적고 있다. 그런데 조금씩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순수와는 먼 세속의 때가 묻어 있다. 기사 중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을 수 있었다. 기자의 서술에 장기오 PD의 인터뷰가 섞여 있다. “1980년 김동리의 <을화>를 기점으로 <TV 문학관>은 26년 동안 293편의 '문학과 드라마의 만남'을 내놓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매주 주말에 방영되던 이 프로는 2005년부터 ‘비정기 간행물’ 신세가 됐습니다. 방송사는 매년 10편씩으로 제작편수를 축소했습니다. 장 PD는 “이게 다 정연주 사장이 한 일이지요”라며 역시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의 방송장악 논란으로 한참 민감했던 전 KBS 사장 정연주씨의 이야기가 수필집의 출간 소식에 함께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에 정연주-장기오의 조합이 심상치 않다. 장기오 PD를 압축 설명하는 <TV 문학관>과 순수문학의 세계관과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쓴웃음은 어떤 의미일까? 기사의 마지막 부분으로 언급된 장기오 PD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지금 KBS에는 지난 10년 김대중·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권력을 쥔 ‘젊은 기득권 세력’이 있습니다. 정연주 사장 퇴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늙은이들이라서 열정적으로 앞에 나서지 않지요. 뭐 곧 은퇴할 거니까요.” 갑작스레 나온 정연주 전 사장과 은퇴할 늙은이라는 자조적 표현은 장기오 PD에게 무언가 응어리가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또, 지난 10년의 ‘젊은 기득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혹시 이런 응어리가 그를 열정적으로 뉴라이트 앞에 나서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기사를 보니 아마도 그것은 다음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2004년 정년을 앞두고 그가 했던 인터뷰인데, 마침 그는 <TV 문학관 -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강물은 흐른다>로 상하이 TV 페스티벌에서 매그놀리아 테크놀로지 대상을 수상했던 참이었다. 작품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저를 비롯한 방송쟁이들 이야기입니다. 거의 가정을 안 돌보고 일에만 매달려 왔더니 어느 순간 아내가 자기 인생을 찾아야겠다고 이혼을 하자고 그러네요. 또 조국근대화의 역군으로 평생을 바쳤더니 어느새 후배들한테 기회주의자 보신주의자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우리 5060 세대 이야기지요.”(연합뉴스, <연합인터뷰>정년퇴임하는 장기오 KBS 대PD, 2004년 6월 17일) 이즈음 되니 장기오 PD의 정치색이 순수의 무채색에서 유채색으로 조금씩 짙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변인으로부터는 “KBS 드라마계의 순수파 거장”(정영주(2001), 창사 특집 TV 문학관 제 2TV ‘홍어’-낮고 느린 목소리로 들려주는 인생의 의미, KBS JOURNAL 2001년 2월)으로 불려지고, 스스로는 드라마 PD라는 직업에 대해 “생의 본질 탐구하는 속 깊은 관찰자”(장기오(2003), “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속 깊은 관찰자”, 「PD가 말하는 PD」, 부·키)라고 불렀지만 그는 가슴 속 응어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짐작컨대 소위 ‘젊은 기득권’과 이전 세대를 기회주의자로, 보신주의자로 매도하는 세상에 대한 울분 같다. 시청률의 이름으로 <TV 문학관>을 지워버린 세태에 대한 서운함 같다. 그렇다면 그가 보는 지금의 젊은 세대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
세대와의 소통은 대화로 해야 합니다 | |||||||||||||||||
뉴라이트 드라마 제작 앞둔 장기오 PD에게 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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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오PD가 바라본 지금의 젊은 세대 “많은 젊은이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이루어낸 민주화가 달성되면서 이념을 위한 투쟁은 더 이상 필요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투쟁이 필요 없는 시대의 이념은 트렌드화 되어버렸다. 반미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젊은이라면 으레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 휴대폰 같은 장신구나 패션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무슨 거창한 소신이나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괜히 빠지면 왕따 당할 것 같아 광화문 촛불집회에 가족들 데리고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참석한다. 아이들 장난처럼 코믹하게 혹은 스트레스를 푸는 운동처럼 이념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유신시대든 군부독재시대든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 던지고 싶은 충동을 꾹꾹 참으면서 말없이 착하게 살아온 많은 소시민들을 수구꼴통으로 몰아붙이는 패션형 이념은 내용의 좋고 나쁨을 떠나 무엇이 트렌드인가를 저울질한다.”(장기오(2007), TV 드라마 각색의 사례연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그의 이와 같은 생각은 굉장히 논쟁적이다. 우리에게 지금 민주화가 달성되었는지, 이념이 과연 트렌드와 패션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과연 우리가 스트레스를 풀러 광화문으로 나갔던 것인지를 아무리 자문해 보아도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나 지난 여름, 촛불 국면에서 본 10대의 발랄한 정치는 그저 아이들 장난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물론,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그 가족이 내 가족뿐만 아니라 여러 가족이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생각건대 그런 이유로 꾹꾹 참으면서 말없이 착하게 살아온 많은 소시민을 수구꼴통으로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화살은 장기오 PD에게 돌아간다. 혹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을 하려 했는지 말이다. 다름을 다르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틀리다고 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장 PD는 정년퇴임 후 아예 드라마를 안 보고 산다. 보기만 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기 때문”에. 젊은 후배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세대차이라고, 오히려 이 시대 문화코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반박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느낌은 곧 장기오 세대들, 5060 세대들이 TV 드라마 보면서 느끼는 일반적인 소외감일 것이다. 여러 계층이 접근할 수 있는, 보다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간다.”(양승혜(2004), 변해야 산다<10> 전문 영역에서 일가 이룬 작가주의 PD들-장인정신으로 독자적 세계 구축, 신문과 방송 제 408호. pp.91-92)
물론 그렇다. 여러 계층이 접근할 수 있는 보다 다양한 이야기가 필요함에 적극 공감하다. 그가 <TV 문학관>을 통해 보여준 원숙한 영상미와 탐미주의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은 시간의 누적을 거치지 않고서는 다듬어질 수 없는 거장의 손길 때문이었다. 그의 작가주의를 존중하며 그의 작품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손꼽고 있다. 다양성이 상실된 TV와 이로부터 발생하는 소외감을 5060 세대만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탓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식히는 일이다. 흥분보다는 대화가 먼저다. 왜 나만, 나의 세대만 소외되는가를 말하지 말고 왜 다른 여러 사람들도 소외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령 이주노동자, 여성, 다문화가정, 성적 소수자 등도 오랫동안 소외되어 있었다. 굳이 5060 세대만을 내세울 필요는 없는 셈이다. 나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라는 인식이 먼저 있어야 많은 계층이 접근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운다면 결국 이는 단 하나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자리 바꾸기 게임일 뿐이다. 혹시 자기가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박탈감으로 인한 이기적 욕망의 분노가 아니었던지, 그리고 이를 감추기 위해 곁다리로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이야기를 이야기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그 뒤에 나뿐만 아니라 정말로 많은 사람이 소외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지난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것은 구조를 바꾸는 실천이다.
“지금이라도 누가 있어 그런 카리스마를 행세한다면, 아마 십 년 먹은 체증이 다 내려갈 것 같다. 그때 그 사람들이 새삼 생각나는 것은 흘러간 세월의 미련이 아니라, 그런 당당한 권위의 실종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이다.”(장기오(2008),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도서출판 이유, p.166) 이것은 당당한 권위가 아니다. 한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혈 폭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작 현장의 후진성, 아니 전근대성에 다름 아니다. 이에 대해 향수를 갖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지도자를 따르는 모델이 탁월한 효율성을 발휘하지만 이는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되어 나와 남 모두를 공멸하는 길임을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구조적 폭력에 희생되는 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되묻고 싶다. 그저 묵묵히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 던지고 싶은 충동을 꾹꾹 참으면서 말없이 착하게” 사는 게 모두의 모범 답안이 될 수 없다. 사표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들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고 참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세상이 더 이상적이지 않는가. 물론, 현실 세계는 이상과 달리 그러하지 못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한정된 자리를 놓고 싸우는 아비규환이 현실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이 장기오 PD가 생각하는 것처럼 ‘젊은 기득권’이 옛 세대를 수구꼴통, 기회주의자, 보신주의자로 몰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답은 다른 곳에 있다. 장기오 PD는 여러 곳에서 드라마 PD로서의 자존심을 위협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거에는 연기를 잘하는 연기자가 대우를 받았지만, 지금은 인기 위주이다. 모국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던 탤런트가 어느 날 갑자기 스타가 되면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다. 스타 권력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연출자들도 탤런트 눈치를 본다. 소신 있는 연출을 할 수가 없다. 일은 같이 하지만 동업자라는 느낌이 안 든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인 것이다. 가난했지만, 사람간의 소통이 되었던 그때가 더 풍요롭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자본이 발달할수록 천박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인가? 그 때의 순수가 그립다.” 그렇다. 장기오 PD가 잘 보았듯 너는 너고, 나는 나로 만들어 서로를 차단케 하는 벽은 자본주의로부터 비롯한다. 보신주의와 기회주의로 매도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세대별 다툼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옛 세대를 빨리 내보내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소비력 높은 젊은 세대의 감각에 편승하기 위해 옛 세대의 지혜를 헌신짝 여기듯 하기 때문이다. 허나,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혹독한 비평가인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개인에게 탓을 하기 이전에 그 이면에 있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
장 PD께 ‘뉴라이트’는 안어울린다 | ||||||||||||||
뉴라이트 드라마 제작 앞둔 장기오 PD께 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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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의 갈라짐과 쪼개짐 이면은 신자유주의 “자본가와 지주를 나는 결코 장밋빛으로 아름답게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들이 문제로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익의 담지자인 한에서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과 달리, 개인이 이러한 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칼 마르크스(2001), 「자본론」, 비봉출판사, p.6-7)
그런 의미에서 독설닷컴을 운영하는 고재열 기자의 최근 기획은 흥미롭다. 그는 90년대 학번을 298 세대라 하는데, 이는 386 세대에서 88만원 세대를 뺀 것이라 한다. 386 세대와 88만원 세대의 중간에 자리 잡은 이들은 고재열 기자의 작명에 따르면 두 세대를 거치지 않고서는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세대인 셈이다. 고재열 기자 역시 장기오 PD처럼 세대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데, 장기오 PD보다 진일보한 것은 세대의 갈라짐과 쪼개짐의 이면에 있는 우리사회의 신자유주의화를 함께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맨 앞자리에는 산업화 세대인 경제개발 5개년 세대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민주화 세대인 386세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뒤에 문화 세대인 우리 298세대가 있습니다. 우리 다음 세대 특성을 보면 흥미로운 것은 이들 뒤에 다시 정치 세대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아래 위 세대와 비교해서 298 세대의 특성을 구분하면 이렇게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년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단순히 조직 내부의 권력 관계와 이념적 호불호, 세대에 대한 반감만으로는 소외의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사람을 거스르는 시스템을 문제 삼아야지 사람만 바뀐다고 좋았던 옛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다. 또 옛 시대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 오늘의 현실과 오늘의 조건에 반응하여 피부에 와 닿는 오늘의 문제를 사고해야 한다. 추억에 잠기기엔 현실의 속도가 숨 가쁘다.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지점부터 추슬러야 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공영성/공공성의 수호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장기오 PD의 작품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뒤늦게 본 그의 후기 작품에서 반복되고 있던 주제는 물질만능주의로 변한 세태에 대한 비판과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고집에 대한 존중이었다. 장기오 PD의 현 상황을 작품에 투사했다고 해석해도 큰 무리가 되지는 않을까 한다. 나는 그의 드라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와 같은 주제의식에 쉽게 끌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시대의 흐름에 선뜻 몸을 내맡기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그의 세계관을 전부 인정할 수는 없지만, 뚝심과 끈기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켜낸 그의 작가정신만은 존중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대PD의 영예와 텔레비전에서는 드문 작가주의 PD라는 주변의 평가는 단순히 오랫동안 드라마를 만든 이들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다. 장기오PD, 뉴라이트 역사드라마로의 복귀 소식은 우울하다 그러나 드라마의 픽션이 현실의 픽션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장기오 PD가 연출을 맡게 될 <남산위의 저 소나무>는 순수문학의 세계가 아니다. 격동의 한국역사에 대한 PD의 평가는 우리 사회에 첨예한 논란을 야기할 것이다. 여전히 그 해석에 영향 받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당장에 역사적 사실 해석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촉발될 것이다. 작가주의는 이를 위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 <TV 문학관>은 달랐다. 문학과 영상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여러 다양한 가능성을 픽션을 통해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PD의 자율성은 극대화될 수 있었다. 작가주의는 그 속에서 빛날 수 있었다. 삶에 대한 관조이기 때문에 삶의 입체성을 빛내주는 다양성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재를 현실의 역사로 가져올 때 작가주의는 타협하지 않는 독단과 오집으로 빛이 바랠 가능성이 짙다. 다양성을 단일성으로 바꿀 수 있다. 소설에 비해 현실의 구체적 물질성은 작가주의의 창의성의 폭을 훨씬 좁혀 놓는다. 더욱이 드라마의 제작을 이미 이념적 색채가 짙은 뉴라이트전국연합이 맡고 있는 점은 위험스러운 부분이다. 기획 및 예산의 독자성 확보를 누구보다 강조했던 장기오 PD(장기오(1997), 「TV 드라마 바로보기, 바로쓰기」, 박영률출판사, pp.72-75)가 이념적 색채가 짙은 단체의 지원을 받아 제작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의아하다. 자칫 그의 반평생의 작가주의가 이번 드라마로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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