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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웅강좌: 대한민국의 성립과정과 이승만,),8/14(토),7:30분

pudalz 2010. 8. 14. 01:40
전독립기념관 관장님이시자 곧은 언론인이신 김상웅선생님의 강좌가 있습니다.
8/13일 한겨레 기고칼럼 보셨죠? 병탄(강린의 국권침탈)과 병합의 차이와 조약의 실효성없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바른 눈으로 세상을 똑바로 보고 바른 길에 서서 바르게 살 수 있도록 그래서 엇나가고 빗나가지 않도록 
바른 역사관과 언론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을주신
선생님의 강의를 처음으로 들을 생각을 하니 기대가 부품니다. 시간나면 한 번 들어보세요.
 
8/14(토)/김상웅강좌: 대한민국의 성립과정과 이승만/7:30분p.m.-
 
 
약도

 

 

 

김상웅: 

 

블로그 바로가기 -> 김상웅의 인물연전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

 

알라딘 저자소개 약력

정치평론가이다. <민주전선> <평민신문> <민주신문> 등 진보적인 매체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일간지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에서 주필로도 활동했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고, 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를 비롯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 《친일인명사전》 편찬 자문위원 등도 맡았다.

저서로 《친일정치 100년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국필화사》 《위서》 《금서》 《한국현대사바로잡기》 《을사늑약 1905년, 그 끝나지 않는 백년》 《통일론수난사》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나》 《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단재 신채호 평전》 《백범 김구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안중근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 《장준하 평전》 《죽산 조봉암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 등이 있다. 

 

 

 

 

 

 

 

 

 

 

 

관련 기사

[동아일보]
...........전략

 김삼웅(金三雄·61) 독립기념관 이사는 1970년대 신민당 당보였던 ‘민주전선’ 편집부장을 시작으로 ‘사상계’를 거쳐 평민당보인 ‘평민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구 야당인맥에 속한다.

1993년부터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만들었던 아태평화재단 기획조정실장으로 4년여간 근무하며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을 유지했다. 그러나 한번 원칙을 세우면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고집 때문에 김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김 전 대통령 집권 직후 서울신문 주필 겸 상무로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독학으로 친일문제를 공부한 ‘재야 사학자’로 분류된다. 백범학술원 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한국곡필사’ 등이 있다.

............후략

 

 


 

<안내>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근현대사 집중강좌

 

 

*장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강의실
*강의시간: 19시~21시
*강좌료: 강좌 당 5,000원(당일 접수)
*신청: 이름, 나이, 연락처, 각오 기재 바람
 신청 바로가기

*진행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청년위원회(문의: 청년위원장 김동환 010-7741-2121, kmuwing@hanmail.net)

 

안중근

 

국권회복운동 ▶민족의식형성

안중근 집안은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한 이래 국가권력의 침탈로 부터 많은 보호를 받았다. 황해도 천주교회의 책임자격인 빌렘신부는 치외법권을 소유한 선교사로서 지방관과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발생한 수많은 분쟁들에 개입하여 직접 해결하거나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은 주교에게 부탁하거나 주한 프랑스 공사에 의뢰,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케 하였다. 이 때문에 황해도 지역의 많은 이들이 천주교회를 찾았다. 안중근은 당시 상황을 “그 때 교회는 차츰 확장되어 교인이 수만명에 가깝고 선교사 여덟 분이 황해도 안에 와서 머물고 계셨다”라고 술회하였다. 빌렘 신부는 그의 관할지역내에서의 괄목할 만한 교세 신장의 원인으로 선교사들의 분쟁 해결 노력과 함께 신도들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들었는데, 헌신적인 신도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안중근의 작은아버지 안태건이었다. 안중근 역시 작은아버지 못지 않은 열렬한 신심의 소유자로 빌렘 신부의 복사(服事)로 수행하여 해주 옹진 등의 여러 지방을 순방하여 연설을 하였으며. 1897년 12월 1일에는 청계동을 방문한 뮈텔 주교를 수행하여 해주까지 가기도 하였다. 안중근은 “지금 세계 문명국 박사, 학사, 신사들로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천주교를 문명교화의 상징으로까지 이해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외국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드러내는 한국인들을 압제하는 태도에는 당당히 저항하였다. 당시 치외법권을 소유한 선교사로서 국가권력에 맞서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던 빌렘 신부가 한국인들에게 군림하며 압제하였기에 안중근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 동안에 나는 홍신부와 더불에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 홍신부는 언제나 교인들을 압제하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여러 교인들과 상의하되 ‘거룩한 교회 안에서 어찌 이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당연히 경성에 가서 민주교에게 청원하고 만일 민주교가 안 들어주면 당연히 로마부 교황에게 가서 품해서라도 기꺼이 이러한 폐습은 막는 것이 어떻소’하자 모두들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안중근은 종교의 신성성을 근거로 교회내의 주교나 교황 등 상급자에게 호소를 하여 빌렘 신부의 압제의 폐습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빌렘 신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성이 나서 안중근을 무수히 치고 때렸으나, 뒤에 “잠시 성을 낸 것은 육정(肉情)으로 한 일이라 회개한다”며 잘못을 빌고 용서를 청하였다. 안중근은 선교사의 권위 보다는 종교의 교리를 더 존중하였다. 이 때문에 종교적 가르침을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고 그에 근거하여 선교사의 압제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또한 1900년 경 안중근은 뮈텔 주교를 찾아가, 한국 교인들이 학문에 어두워서 교리를 전도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알고 서양 수사회(修士會) 가운데서 박학한 선비 몇을 청해다가 대학교를 설립하여 국내의 자제들을 가르칠 것을 건의하였다. 안중근은 교육을 통해 한국인을 문명하기 위해 경성에서 천주교 대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선교사에게 의논했던 것이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한국인이 만일 학문이 있게 되면 교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의논을 꺼내지 말라”며 거절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분개함을 참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맹세하되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하고, 홍신부로부터 배우던 프랑스어 공부를 중단하였다. 여기서도 안중근이 천주교와 선교사를 분리해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 때문에 배우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안중근은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영어를 배우는 자는 영국의 종놈이 된다. 내가 만일 프랑스 말을 배우다가는 프랑스 종놈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래서 폐한 것이다. 만일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을 통용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안중근이 천주교 교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중근의 주체적인 신앙 태도는 일찍이 민권의식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민권의식이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에 대한 자각으로, 안중근은 이를 천주교 교리와 천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숭배를 통해 습득하였다. 안중근은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경문을 강습도 받고 도리를 토론도 하여 신덕(信德)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지 않게 되자, 홍석구 신부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도하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하였다.

“형제여, 내가 할 말이 있으니 꼭 내 말을 들어주시오… 대개 천지간 만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혼이 신령하기 때문이오. 혼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혼(生魂)이니 그것은 초목의 혼으로 능히 생장하는 혼이요, 둘째는 각혼(覺魂)이니 그것은 금수의 혼으로서 능히 지각(知覺)하는 혼이요, 셋째는 영혼(靈魂)이니 그것은 사람의 혼으로서 능히 생장하고, 능히 지각하고, 그리고서 또 능히 시비를 분별하고, 능히 도리를 토론하고, 능히 만물을 맡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는 것이오.”

인간은 천지만물 가운데 영혼을 가진 가장 고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영혼은 천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불어 넣어 주신 것이다.

“허다한 동물들이 사람의 절제를 받는 것은 그것들의 혼이 신령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영혼의 귀중함은 이것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이른바 천명(天命)의 본성이란 것은 그것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천주께서 사람의 태중에서부터 부어 넣어 주는 것으로서 영원무궁하고 죽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요.”

영혼이 인간이면 모두에게 부여되므로 영혼을 갖는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동등한 인격의 주체가 된다. 하늘이 백성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으니, 세계 만민은 하느님의 동포, 형제, 자매로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인간평등, 생명존중에 대한 자각이야 말로 민권사상의 토대가 된다. 안중근은 민권의식을 바탕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부당한 압제에 저항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당시 문명개화론자들은 기독교가 서양 근대문명의 근본이라는 판단에서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기독교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기독교를 믿으면서 국가나 민족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기독교 신앙에만 안주하여 국가와 민족의 존망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영혼구제와 천국주의만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혹 외국인을 숭배하여 자국정신이 없어져 외세의존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선교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들 역시 하느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엄격히 구분하는 전통신학을 공부한 이들이었다. 이 신학에서 강조한 것은 오직 초월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관심사 이를테면 내세중심의 영혼구원에만 충실하는 것이었고, 교회가 현실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영성생활을 저해하는 위험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실제로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서 활동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원칙을 선교방침으로 채택하여 천주교 신앙을 내세에서의 구원으로만 가르치고 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침탈되어 가는 한국의 국권이 아니라 그들의 선교권 보장이었다. 외국인 성직자들에게 한국 민족수난의 고통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일투쟁을 근본적으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한국침탈에 대해 무력으로 항거하기 보다는 실력양성의 방법을 권유하였다. 대부분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전개하였던 의병운동에 비판적이었다. 실제로 빌렘신부는 안중근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려 하자, “네가 만약 참으로 국사에 진력(盡力)하려면 모름지기 교육에 종사하고 곁들여 선량한 교도 착실한 국민이 되게 하라. 네가 일시의 분격에 의해 경거하여 국사에 분주하는 따위는 다만 네 일신을 망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라고 하여, 국내에 남아 교육운동을 통한 실력양성에 매진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만일 네가 여기서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려 한다면 네가 떠나든지 내가 떠나든지 하자”며 독립운동에 적극 반대하였다. 안중근의 하얼빈의거에 대해서도 한국의 전(全) 가톨릭을 담당했던 교구장 뮈텔 주교는 “공적인 재난”으로 규정하고, 안중근을 살인자로써 죄악시 하였다. 빌렘 신부 역시 안중근의 행동은 “오해에서 나온 용서받지 못할 범죄행위”라고 비난하였다. 반면 안중근은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에 반대하였던 조선교회의 방침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회에서 정교분리를 엄격히 주장하며 신도들의 독립운동마저도 정치운동으로 판단하고 이를 파문으로 금했던 당시의 교회 長上에 저항했고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피해를 받았다. 안중근은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며, 민족을 종교보다 우선시 하였다. 안중근은 국권회복을 종교신앙보다 우선시 하였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종교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국적(國賊) 이등박문을 저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등 저격은 ‘비인도적 살인행위’라는 검찰관의 비난에 맞서 ‘이천만 동포의 염원을 대표한 독립전쟁(義戰)’이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 국권회복운동▶교육,식산운동

    안중근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교육, 식산운동을 벌였다. 이는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 문명개화를 이룩하여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운동이었다. 안중근은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날마다 신문과 잡지와 각국 역사를 상고하며 읽어 이미 지나간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일들을 추측하는 등” 시국에 대한 인식을 갖기 시작하였다. 안중근은 저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다.

    “(검찰관) 문: 신천 진남포에 그대가 있을 즈음에는 별로 국사나 정치 등에 분주한 일이 없는 듯한데 그러한가 (안중근) 답: 그대로이다. 5개조약이 성립하고부터 처음으로 깨닫고 시기는 늦었으나 열심히 하면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래 분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안중근은 1905년 이후 본격적으로 국권회복 운동에 뛰어 들었다. 이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안중근은 양 전쟁을 동양평화 유지와 한국독립에 기여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안중근은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이 중국의 간섭에서 독립국이 되었으며, 러일전쟁도 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이 재산과 성명을 걸고 일으킨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안중근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또 한국의 독립을 기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안중근은 “실제 한국인민은 일로전역 전까지는 호개(好個)의 친우로 일본국을 좋아했고 한국의 행복으로 믿고 있었다. 우리들 따위도 결코 배일사상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로 전역까지는 이천여만의 동포가 일본의 종민(從民)임을 기뻐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박영효 계통의 개화파 인사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안중근은 한국을 문명국으로 만들 의도에서의 일본의 보호정책, 즉 개화에는 긍정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한국을 개화시켜 주는 일본의 “보호정책의 취지는 한국민이 전부 주지하고 있고 감사”하는 바이며 개화를 대행하여 줄 일본은 “호개(好個)의 친우(親友)”요 “한국(韓國)의 행복(幸福)”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안중근은 국권회복 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상해로 망명하여 열강들에게 조선민족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여 국권을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상해의 천주교당 앞에서 황해도 재령의 본당 신부였던 르각(Le Gac, 곽원량(郭元良), 1876-1914) 신부를 만나, “속히 본국으로 돌아 가서, 첫째 교육의 발달 둘째 사회의 확장 셋째는 민심의 단합 넷째는 실력의 양성 등 네가지를 확실히 성취하도록 하라”는 훈계를 듣고 곧장 진남포로 돌아왔다. 교육발달 사회확장 민심단합 실력양성 등을 통해 국력을 기르고 이를 바탕으로 국권을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네가지를 성취하기만 하면, “2천만의 정신(마음)의 힘이 반석과 같이 든든해서 비록 천만문(千萬門)의 대포를 가지고서도 능히 공격하여 깨뜨릴 수가 없을 것이니, 그렇게 하면 한번 강토를 빼앗겼다는 것도 형식상으로 된 것일 뿐이요, 조약을 강제로 맺았다는 것도 종이 위에 적힌 빈 문서라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 하여, 침탈 당한 국권도 곧 되찾을 수 있다고 설득하였다.

    르각 신부는 안중근에게 실력양성운동을 권유한 것이었다. 당시 문화계몽운동가들은 국권상실이 열강에 비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판단하여,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곧 국권을 회복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때의 문명 개화운동은 민중계몽을 통한 실력양성을 일차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신문 잡지 등의 언론활동과 학교설립을 통한 교육활동 등을 주로 하던 문화운동 등의 형태를 취하였다. 문화계몽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 바로 학교설립을 통한 교육운동이었다. 교육구국론이었다. 당시를 학교설립의 시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국적으로 각종 학교가 세워지고 있었다.

    실력양성론자들은 교육이 국력 배양의 출발점이 된다고 생각하여, 국가의 건설 부흥에는 반드시 교육을 제일로 하며, 조국의 흥망은 학교의 성쇠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안중근도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안중근은 교육운동을 통해 한국을 문명화 하려고 하였다. 국권회복은 문명개화를 요하며, 문명개화는 신교육의 보급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육운동을 위해 안중근은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당시 명칭은 삼화항(三和港)) 용정동으로 이사하였다. 진남포는 청일,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병참기지로서 발전한 도시로서 특히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인 이주자들이 급증하였다. 안중근은 진남포 본당에서 운영해 오던 돈의(敦義)학교의 재정을 부담하며 제2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같은 본당 내에 설치된 삼흥(三興: 사흥(士興), 민흥(民興), 국흥(國興))학교의 재정을 받아 운영해 나가며 구국영재를 양성하였다. 안중근의 민족의 각성을 목적으로 교육운동에 헌신하였으며, 동생 안정근은 서울에 있는 양정의숙에 안공근은 한성사범에 진학시켰다.

    안중근은 식산운동에도 종사하였다. 문화계몽운동에서 실력을 양성하고 자강을 추구한 또 하나의 영역은 식산흥업운동이었다. 식산흥업활동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논의는 일찍이 초기개화파의 문명개화론이나 이와 관련된 개화파정부의 식산흥업정책에서 줄곧 강조해오던 것이었다. 구래의 지주제는 유지하되 이들의 자본을 이용하여 근대적인 산업자본을 형성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양의 근대적인 회사제도나 발달된 기술문명을 수용하여 산업부문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산업을 발전시켜 부강해져야 한다는 이른바 실업구국론이었다

    안중근은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고자 평양에 가서 한재호(韓在鎬) 주병운(朱秉雲) 등과 함께 삼합의(三合義)라는 석탄을 채굴하는 상업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1907년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관서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단연회(斷煙會)에 가입하여 국채보상금을 모금하였으며, 이 해 봄에는 서우학회에 가입하였으며, 여름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의 방해로 석탄상이 실패하고 수 천 원의 손해를 보게 되자 교육,식산운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으며, 게다가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삼합의 회사를 정리하였다.

    안중근의 교육,식산운동은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이었다. 한국 독립은 국력 충실이 근본이며 국력충실은 인지를 계발하고 식산 공업을 성대하게 하는데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교육구국운동과 실업구국운동을 전개해본 결과, 안중근은 통감부 통치하에서는 실력양성운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중근이 하얼빈의거 직후 열거한 이등의 죄상 15조 중, 교과서 압수 소각, 내외국 신문구독금지, 교육방해, 외국유학 금지 등은 교육권박탈을 지적한 것이며, 제일은행권 강제발행, 국채 강제부담, 철도 광산 산림 천택 강탈 등은 경제권침탈을 언급한 것인데, 이는 교육,식산운동의 실천적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이 때문에 안중근은 실력양성운동을 포기하고 무력투쟁으로 국권을 되찾기 위해 해외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이상 안중근은 교육,식산운동을 통해 한국을 문명화된 사회로 개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사회진화론의 ‘경쟁에 의한 진보’라는 기본원칙에 의거할 때, 강자로 성장하는 길이 문명화, 근대화, 자본주의화이므로, 문명화한 강자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문명국 일본의 지도’에 의한 문명화라는 논리가 확산되면서, 대한자강회 회원인 윤효정은 “아민의 행복을 증장하여 선진국의 광휘를 선양”할 수 있는 사람이 이등이라고 추켜세우고 그의 연설을 금구옥언이라고 하였다. 대한협회 등은 “선진문명국의 지도에 의하여 국사를 정리하고 인문을 장려하여, 지금부터 백성이 협동일치하여 문명을 흡수하고 시정을 개선하여 나라의 부강을 증진하려는 것이다”하였는데, 이들은 문명화는 곧 일본의 지도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일본의 지배를 문명화하는 것으로 여겼다. 서양 선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빌렘 신부는 “일본은 문명국이며 또 한국에 대한 보호정책은 공명정대하다”고 하였으며, 뮈텔주교는 조선총독부는 “합법적인 정부”이며 천주교회는 이에 충성할 것이라고 하였다. 안중근도 을사조약 체결부터 이등의 정책에는 물론 반대하였지만 “이등의 보호정책이 잘 되면 아국의 발달도 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이는 안중근이 실력양성론을 견지하는 한, 문명개화론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신뢰하고 있던 안중근은 “점점 한국은 이등으로 인하여 불리해지므로 마음이 변하여 이등을 적시(敵視)하기에 이르렀다.” 즉 날로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객관적인 상황을 보면서 제국주의 침략의 모순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안중근은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국권을 탈취하려는 (이등의) 야심을 꿰뚫어 보게 되었으며”, 이 이후로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국적(國賊) 이등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심을 하였다.

    안중근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있었기에 문명개화론을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검찰관이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 이래) 한국에는 기차의 개통이 있고 수도공사 기타 위생의 완비를 보았으며 대한병원의 설치가 있고 식산 공업은 점차 왕성하여 졌다”고 하여 통감부 보호정치하의 ‘시정개선론’을 주장하자, 안중근은 “이와 같은 변화가 한국의 진보 또는 편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검찰관의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 이래 식산공업의 발달 위생 교통 기타 내정은 점차로 완비되고 있으나 그대와 같이 본국에 살지 않는 자는 그 은택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를 것이다”라는 이른바 ‘무지론’ ‘오해론’ 주장에 대해, 안중근은 “위생 교통의 완비 기타 학교 등의 설립이 있었던 일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일본인을 위해 한 것으로 한국을 위해 진력한 것은 아니다.”고 반박하였다. 식민지 문명개화란 제국주의 수탈을 위한 것일 뿐 그것이 한국의 발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검찰관의 “이등이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을 보호 원조하고 한국의 문화와 물질적 진화를 꾀하며 국력을 신장시키도록 힘쓰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언사로는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나 실제는 그대로 행해지지 않는다. 심히 개탄하여 견딜 수 없다. 세계의 독립국 중에서 법부와 외부의 권한이 없는 나라는 없다.”라고 하여, 국권을 상실한 문명개화 즉 식민지 문명개화론의 허구성을 통박하였다. 이처럼 안중근은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문명개화론을 반대하였다. 이에 맞서 그는 “무릇 문명이란 동서양 잘난이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경쟁의)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다.”라고 하여, 적자생존이 아닌 평화공존의 인도주의적 문명론을 개진하였다.

     

  • 국권회복운동▶의병전쟁

    한말에 전개되었던 문화계몽운동은 위로부터 전개된 부르조아 변혁운동이었지만 망국이라는 사태가 현실적으로 다가오자 서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문명개화론적인 실력양성론의 발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장항쟁론의 대두였다. 문화계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분화내지는 자립화의 시기는 대체로 1907년 전후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으로 광무황제(고종)가 폐위하고 사법권을 박탈 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었으므로 한국은 이미 국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항의하여 인민이 일제히 분발하여 전국에서 의병운동을 일으키자, 안중근은 해외에 나가 의병을 조직하여 국내 의병운동에 호응할 생각을 하고, 1907년 8월 경성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당시 통감부는 물론 외국 선교사 심지어는 실력양성운동론의 입장을 견지하는 계몽운동가들까지 의병을 “나라를 멸망하는 폭도들”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들은 의병을 비적, 무뢰배, 비도, 불한당, 화적 등이라 칭하며 의병운동을 반대하였다. 반면 안중근은 의병을 “국난을 구하려고 일어난 충군애국지사(忠君愛國之士)”라고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를 “국난을 구하려고 거병한 의병”으로 자임하였다. 안중근은 “강도들이 도리어 우리를 폭도(暴徒)라 일컫고, 군사를 풀어 토벌하고 참혹하게 살육하여 두 해 동안에 해를 입은 한국인이 수십 만명에 이르렀는데도 제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막는 의병을 폭도라 매도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며, “타인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병이야말로 폭도이며 이등은 그 거괴(巨魁)”라고 하였다. 안중근의 의병에 대한 높은 평가는 그가 허위, 민긍호, 이강년, 최익현 등 의병장을 충신으로 높게 평가한 반면, 이상설, 안창호, 이갑, 양기탁, 장지연, 최재학 등은 지사(의사, 유지가)로 한단계 낮게 평가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안중근은 “스스로 강한 힘으로 스스로가 국권을 회복해야만 건전한 독립이라 할 수 있다.”고 하여 강력한 무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의병전쟁이야말로 국권회복의 무력투쟁이다.

    안중근도 의병으로서 일병을 대항하려는 것은 “추(錐)로 대산(大山)을 파는 것과 같아 도저히 무익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안중근은 두만강안에서 실전을 겪으면서 의병에 대해 치욕(恥辱), 치소(嗤笑), 분개(憤慨)를 느꼈다. 먼저 치욕(恥辱)은 자유에 기초하여 나온 의병이 타인의 제재를 받아야 할 것이 없다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지휘명령이 행해지지 않고 통일이 되지 않아 오합지졸이 됨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며, 다음 치소(嗤笑)는 의병이 하등의 규구(規矩)도 없고 통일한 군의(軍議)가 없어 제 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며, 의병이 이상과 같은 상태이므로 인민의 정도와 국정을 돌아올 때 언제 독립의 기초가 만들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분개(憤慨)를 금치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이등이 한국민족이 보호정치를 수용하여 태평무사한 것처럼 국제사회의 여론을 기만하고 있으므로 이등의 보호정책에 한국민이 열복(悅服)하지 않음을 세계에 알리려면 의병전쟁을 통한 무력저항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 한인사회의 유력자들에게 의병 부대 창설에 설득 작업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인섭, 김기룡과 의형제를 맺고, 이범윤의 동의를 받아냈다. 안중근은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 단계로서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안중근은 동포사회를 돌아다니며 의병부대 창설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노적(老賊) 이등이 양민을 폭도라 몰아 10만 명 이상을 도륙하고 한국을 침략하여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었으며, 황제를 폐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철도,광산,산림,천택을 뺏지 않은 것이 없으며, 관청으로 쓰던 집과 민간의 큰집들은 병참이라는 핑계로 모조리 뺏아 거하고, 기름진 전답과 오랜 산소들도 군용지라는 표말을 꽂고 무덤을 파헤친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는 국가의 주인인 백성들이 직접 일어나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우리가 단결하여 주체적으로 일어나 싸우면 국권회복의 기회도 올 것이라고 동포들을 설득하였다. 안중근은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리 생각해 보고 저리 생각해 보아도 결국 한번 의거를 일으키는 것만 같지 못하니 적을 치는 일 밖에는 다시 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의병 거병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지금 한국에서는 내지(內地) 13도 강산에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해외에서도 의병을 일으켜 이에 호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해외동포들이 방관하여 국내의 의병항쟁이 패할 경우, 간사한 도적들은 덮어놓고 폭도란 이름을 붙여 사람마다 죽임을 당할 것이여, 집집마다 불을 지를 것이다.” 그러한즉 “오늘, 국내 국외를 물론하고 한국인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총을 메고 칼을 차고 일제히 의거를 일으켜 이기고 지는 것과 잘 싸우고 못 싸우고를 돌아볼 것 없이 통쾌한 싸움 한 바탕으로써 천하 후세의 부끄러운 웃음거리를 면해야 할 것”이라고 동포들을 대상으로 호소하였다. 설사 병기의 절대적 부족과 군사훈련 부족으로 전투에서 패할지라도, 승패를 초월하여 국내외에서 온 국민이 일제히 거병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안중근의 유세 결과 다수의 한인들이 호응하여 무기, 자금 등을 지원하였다. 마침내 국외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총독(總督)에 이범윤, 총대장에 김두성을 추대하고 안중근은 참모중장의 임무를 맡아 의병전쟁을 개시하였다. 안중근은 의병과 군기 등을 비밀히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 모은 후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 개시에 앞서 국내에 있는 홍범도 부대와 공동작전을 취하고자 1908년 4월과 6월 두차례에 걸쳐 함경도 갑산으로 직접 찾아갔으나, 일본 군대에 발견되어 밀림 속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겨우 연추로 귀환하였다. 안중근의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세 차례 접전하여 1, 2차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3차 전투에서 패배한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했으나 실패하였다. 최재형은 안중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김두성은 의병부대를 해체하면서 안중근에게는 따로 독립특파부대를 조직하여 자유롭게 활동할 것을 허락하였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 등에서 수청(水淸) 하바로프스크(하발표(河發浦)) 등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사회의 교육과 사회조직 건설에 힘썼다. 1909년 1월(음력), 안중근은 연추의 카리(가리(哥里), 가리(可里) 또는 하리(下里))에서 엄인섭 등과 단지동맹을 맺고 이등을 제거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심이 산란하고 또 안중근을 믿는 자가 없었으므로 국가를 위해 진력하는 열심을 타인에게 보이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단지를 한 것이다. 이들은 단지동맹을 맺은 후 그 뒤에 각처로 왕래하며 교육에 힘쓰고 국민의 뜻을 단합하고 신문을 구독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는 등 교육운동에 다시 진력하였다. 그리고는 1909년 10월 26일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천만 동포를 대표하여 하얼빈에서 이등을 저격하였다. 이상 안중근의 의병전쟁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그의 실력양성운동에서 무력투쟁으로의 전환은 신민회 인사들과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는 점이다. 신민회는 1907년을 기점으로 계몽운동 계열이 분화되면서 결성된 좌파의 지하조직으로 존재하면서 계몽주의의 방략을 수정하여 의병과 합류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안중근의 의병전쟁도 신민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보여진다. 안중근은 경 경시(境 警視)의 신문조서에서 “지금부터 3년전(1907년: 필자) 평양에서 석탄상을 실패하고 경성으로 올라가 불란서 선교당 밑에 있는 김기문(金岐文) 집에서 2일간 체재 중 아우 정근과 이강하(李康夏) 집에서 만나 블라디보스톡 행의 뜻을 말했더니 아우는 반대하였다”고 진술하였다. 1907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이 김기문 집에서 2일간 체재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연루자를 보호하기 위해 꾸민 거짓 진술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측 정탐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7년 3월 북간도에 있는 천주교 주신부 백모에게 의지하려고 신부 홍석구로부터 서신을 얻고 간도로 가는 도중 경성에 두류하여 중부 다동(茶洞) 김달하(金達河)의 집에 기우(寄寓)하기를 수 개월 기간(其間) 김종한(金宗漢), 민형식(閔衡植), 김세기(金世基)의 자인 모, 이종건(李鍾乾), 류종모(柳宗模, 충청북도 황간사람), 안창호(安昌浩, 평양사람), 이동휘(李東輝), 강영기(姜泳璣, 함경남도 이원(利原)사람으로 서북학회 지회장) 등과 친교를 맺고 지사(志士)로 자임하였는데, 그가 간도에 가는 제비(諸費) 등은 전기(前記) 강영기(姜泳璣), 김동억(金東億, 金達河의 자), 민형식(閔衡植), 이종건(李鍾乾) 등이 지출하여 동 6월 경성을 출발하여 김동억과 함께 북간도로 갔다고 한다.

    정탐 보고서에 따르면, 안중근은 1907년 3월 서울에 올라와 경성을 출발하는 6월까지 3개월간 머물러 있으면서 지사(志士)로 자임하였으며 안창호, 이동휘(李東輝), 민형식(閔衡植) 등 신민회 주요인사들과 교류를 하였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교육,식산 운동에서 의병전쟁 즉 실력양성론에서 무력투쟁론으로 전환하게 되었을 것이다.

    둘째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이후 공립협회와 그 기관지 공립신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 보면, 먼저 양자 모두 의병을 폭도가 아닌 애국지사(愛國之士)로, 의병전쟁을 독립전쟁으로 보고 있으며, 국내외 모든 이들이 독립전쟁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1905년 4월 5일 항일운동 동족상애(抗日運動 同族相愛) 등을 내세워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된 공립협회(1905-1909)는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국권회복이라는 반침략성을 선결하고 그 바탕 위에서 반봉건성으로 국민주체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공립협회는 의병에게 폭도의 악명을 씌우는 것을 비판하고, “대의로 생명을 버리는 자 어찌 도적인가”라고 하여 의병을 “애국의사(愛國義士)”라 하였다. 또한 의병전쟁을 독립전쟁으로 규정하면서 본국과 해외의 모든 한국인들이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독립전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안중근이 “제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막는 의병을 폭도라 매도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라고 하는 것과 “지금 한국에서는 내지(內地) 13도 강산에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해외에서도 의병을 일으켜 이에 호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다음, 공립협회는 1907년의 정미의병전쟁을 독립전쟁의 최적기로 파악하고 본국과 해외의 모든 한국인들이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독립전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공립협회가 의병전쟁을 독립전쟁의 최적기로 파악한 데는 당시 세계정세에 대한 정보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하나가 미일전쟁설이었다. 1906년부터 표출된 미일전쟁설은 1907-1908년 끊임없이 나돌아 여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미의병전쟁이 일어나자, 공립협회에서는 미일전쟁이 조만간 발발할 것을 예견하면서, 한국 독립의 일대 기회로 포착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안중근도 공립협회의 세계정세관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다.

    만일 이같이 애써 싸우기만 하면 세계열강의 공론도 없지 않을 것이라. 독립할 수 있는 희망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본은 불과 5년 사이에 반드시 아라사와 청국과 미국 등 3국과 더불어 개전하게 될 것이라. 그것이 한국의 큰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때에 있어서 한국인이 만일 아무런 예비가 없다면 설사 일본이 져도, 한국은 다시 다른 도둑의 손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립협회가 ‘장인환 전명운 양씨의 스티븐스 처단을 자유전쟁이다’ 라고 하여 의협투쟁을 독립쟁취를 위한 전쟁, 즉 자유전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는 안중근의 하얼빈의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공립협회는 스티븐스 처단사건의 재판과정 또한 독립전쟁의 과정으로서 이해하였다. 공립협회에서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자유전쟁과 독립재판은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여 세계여론을 통한 일제의 고립화와 독립전쟁을 승리로 도출시키려는 의도였다. 안중근도 이등을 처단한 후 공판정에서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등을 죽였고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으로 도대체 이 법원 공판정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되어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자신은 개인의 남을 죽인 범죄자가 아니며,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의 독립전쟁을 수행하였으며, 하얼빈에 이르러 습격한 뒤에 적군의 포로가 되었으므로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에 의해 판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