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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신진욱]부동산 정치와 자산 계급사회 - 경향신문

pudalz 2010. 4. 29. 14:18

[정동칼럼]부동산 정치와 자산 계급사회

 신진욱 | 중앙대 교수·사회학  2010 4/28(수) 18:14:16
 

지방선거를 한 달 앞두고 또 ‘집’이 세간의 화제다. 집 문제는 정치적으로 복잡하다. 집값이 오르길 바라는 계층, 내리길 바라는 계층이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은 모양이다. 집값을 떨어뜨리지 않고 무주택자의 환심을 사는 것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보금자리주택으로 수도권의 무주택 중산층을 현혹하고, 다른 한편으론 다양한 거래활성화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 정책들엔 공통분모가 있다. 부동산에 대한 욕망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동산 정치’다. 대략 2006년부터 부동산 정치는 수도권 중산층, 나아가 한국정치 전반을 보수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람들의 삶 좌우하는 ‘집’의 힘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은 주거, 자산, 자본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선 사적 자산과 자본의 성격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집’은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선 부동산 불평등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총체적인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걸까? 룩셈부르크 부(富) 연구 그룹(LWS)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계자산 중 실물자산 비중은 이탈리아(85%), 핀란드(84%) 등이 한국(80% 내외)보다 높고 캐나다(78%)나 스웨덴(72%)도 꽤 높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금융자산 비중이 40%나 되는 나라의 사례를 일반화할 수 없다. 나아가 많은 선진국에서도 자산 불평등도는 1980년대 이래 상승 추세라서 한국보다 불평등도가 높거나 비슷한 수준의 나라도 많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집’에 웃고 울지 않는다. 왜일까? 그것은 임금소득과 사회보장, 각종 공적 인프라에 의해 인간다운 삶의 ‘기본’이 충족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럽 사회는 한국보다 소득분배가 훨씬 더 평등하다. 또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적 사회보장 지출의 비중을 보면, 한국은 5% 수준인데 유럽연합(EU) 회원국 평균은 24%에 이른다.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 많은 나라에서 전체 주택 중 공공임대주택의 비중은 20~40%나 된다. 한국은 겨우 5% 수준이라서 사회적 낙인효과까지 있다.

고용과 소득, 사회보장이 삶의 기본을 충족시켜주는 곳에선 누가 궁전에 살든 일반인들이 마음 쓸 바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사정이 다르다. 일자리는 불안하다. 임금 격차도 벌어진다. 퇴직연령은 당겨진다. 자영업은 망하기 일쑤다. 교육비는 감당이 안 된다. 자식의 경제적 독립도 늦어진다. 고령화로 살기는 오래 산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공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어디선가 ‘돈’이 나와야 한다. 어디서 나올 것인가? 자산이다.

유럽 공공임대주택 비중 20~40%

그래서 중산층은 온 힘을 다해 집을 사고 주식·펀드로 돈을 불리려 하지만, 부채나 금융시장 리스크를 떠안고 산다. 불안이다. 자산 하위계층은 여유자금이 없고, 부채비율도 높은 데다, 공금융기관에 접근할 수도 없어 인생이 제자리걸음이다. 절망이다. 하지만 상위계층은 자본과 정보가 풍부하며, 위기를 견디고 이용할 재력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집과 돈’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이런 자산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의미는 커지고 있다. 실로 ‘자산 계급사회’라고 부를 만하다. 자산 계급사회는 부동산 불평등, 투기적 금융시장, 고용불안과 소득격차, 열악한 사회보장, 투기적 산업구조의 문제가 얽혀 생겨난다. 사람들의 불안과 욕망을 도구화하는 부동산 정치가 아니라, 총체적 시스템을 개혁할 비전과 정치세력이 필요하다. 거기에 실패한다면, 부동산투기가 금융투기로 전이될지언정 자산에 따라 삶의 질과 노후, 자식의 계급까지 결정되는 잔혹한 현실은 개선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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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밥, 사회의 선물인가 불평등의 독인가

 신진욱|중앙대 교수·사회학  2010 3/31(수) 18:16:27

 

무상급식이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무상급식 논란의 중심엔 ‘밥’이 있다. 밥은 단지 먹을거리가 아니다. 일찍이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은 밥을 하느님의 은혜와 선물이라 했고, 밥으로 사랑을 나누는 삶을 실천하자고 했다. 사회학자로서 나는 다석의 철학에서 밥이 사회관계의 결정물임을 배웠다. 밥이 사회적 연대의 산물일 때, 밥은 모든 이웃의 사랑이고 선물이다. 밥이 단지 각인이 구매한 상품일 때, 우리가 먹는 밥의 양과 질은 계급적 불평등과 이윤논리를 반영한다. 우리는 밥에서 불평등과 자연착취의 독을 씻어내고, 사회와 자연의 선물로 밥상을 다시 차리는 큰 변화를 필요로 한다.

친환경 무상급식은 복합적 비전

지금 논의되고 있는 친환경 무상급식론은 교육, 복지, 인권, 식품안전, 국내농업 보호 등 굵직한 생활정치 이슈들을 응축한 복합적 비전이다. 그것은 선별적 무상급식으로 인한 낙인을 해소하고 동심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토건산업과 전시성 사업에 몰입하는 국가재정구조를 개혁하여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자 한다. 지자체와 지역 농업의 연계를 강화하여 위탁급식의 안전성 문제와 낭비를 해결하려 한다. 물론 나는 무상급식론이 만병통치약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나눔과 살림의 비전을 가로막는 것은 정책적 장애가 아니라 원리적 저항이다.

첫째, 무상급식을 사회주의라 비난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진짜 쟁점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가 아니라, 공적 원리와 사적 원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다. 대한민국 헌법은 무상 의무교육뿐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노인·청소년 복지향상 등 많은 영역에서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 모든 공적 행위는 무상이다. 또한 우리는 이미 차도, 인도, 공원, 도서관 등 수많은 설비를 무상으로 이용하고 있다. ‘무상은 곧 사회주의’라는 도식은 국가의 공적 책임, 사회의 공공적 차원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소유적 개인주의다. 만약 우리가 사회에서 받은 것도 사회에 줄 것도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회가 아니다.

둘째, 무상급식론을 포퓰리즘으로 몰아가는 주장이 있다. 예산상 불가능한데 민심을 호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4대강 사업 등에 수십조원을 들이면서 아이들 먹일 2조~3조원의 단계적 투입은 불가능한가? 법인세, 종부세 인하로 지방재정을 파탄내고 복지, 교육재정을 몇 조원씩 감축시키며 재정 부족을 말하는가? 문제는 무상급식의 현실성 여부가 아니라, 국가재정 분배의 원칙과 가치다. 세금에서 나온 국가재정을 기업이윤 창출에만 쏟을 것이냐, 국민의 보편적 복지를 위해 할당하느냐다.

우리사회 철학·가치에 대한 잣대

셋째, 공공 급식의 질에 대한 우려가 있다. 부담이 되더라도 내 돈 들여 자식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은 게 부모 심정이다. 하지만 학교와 위탁업체의 연계로 이뤄지는 현행 급식체제가 더 안전하다는 생각은 오해다. 나아가 여기엔 더 깊은 도덕적 문제가 놓여 있다. 중산층 부모들이 내 자식 급식을 돌보는 동안, 무상급식을 받는 저소득층 자녀들의 열악한 현실을 우리 사회는 외면해왔다. ‘건빵 도시락’ ‘단무지 도시락’ ‘얼음장 도시락’ 사건을 기억하자. 우리는 잠깐의 값싼 연민으로 가슴 아파 하고 곧 잊지 않았는가.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아이 급식의 그 ‘우리’와 ‘우리 아이’는 더 넓은 사회를 품지 못한다.

무상급식 논쟁은 우리 사회의 철학과 가치, 도덕적 깊이에 대해 큰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불가의 오관게송(五觀偈頌)에는 ‘이 음식이 온 곳과 그 공덕을 헤아리는’ 대목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 상품이 온 곳과 그 불평등 메커니즘’을 해부했다. 우리 아이들이 먹을 밥은 어디서 온 것이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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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스마트폰 열풍의 사회학

 신진욱 | 중앙대 교수·사회학  2010 2/3(수) 18:11:14

 

스마트폰 열풍이 대단하다. 애플사의 아이폰은 세계시장에 출시된 지 1년 반 만에 글로벌 누적 판매량이 4000만대를 넘어섰고, 한국에서도 출시 열흘 만에 무려 10만대가 팔려나갔다. 삼성의 옴니아2는 하루 판매량에서 아이폰과 경합하고 있고, 모토로이까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시장의 수요로 보나, 정부의 정책으로 보나, 앞으로 한국에서 스마트폰은 빠른 속도로 대중화될 것 같다.


정보통신과 연계된 ‘똑똑한 군중’

이런 제품을 써 본 사람들은 ‘삶이 바뀐다’라는 얘기를 자주 한다. 조그만 ‘손안의 PC’만 있으면 어디서든 인터넷 접속을 해서 e메일을 쓰고, 뉴스를 보고, 검색하고, 프로그램을 내려 받고, 온라인상의 음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휴대폰이 곧 모바일 컴퓨터, 모바일 인터넷이다. 스마트폰과 더불어 컴퓨터도 ‘휴대컴’으로 광속의 진화를 하고 있다. 구형 리브레토에서 시작된 초소형 노트북은 이제 고성능 OS와 화질, 무선인터넷 기능을 갖춘 태블릿PC들로 발전했다.이런 정보통신기술의 진화는 놀랍도록 빨라서, 속도의 시대라 할 수 있는 현대의 시간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일명 ‘삐삐’라고 부르던 무선호출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얼리 어답터’로 통했다. 4㎏이 넘는 육중한 노트북은 활동적인 도시적 삶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10년 전의 첨단기기를 순식간에 골동품으로 만들어버린 스마트폰과 태블릿PC는 놀라운 이동성과 더불어, 온 세상의 정보와 온라인 콘텐츠에 접근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휴대폰과 인터넷이 그러했듯이, 스마트폰은 단지 기술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현상이자 문화현상이다. 정보사회의 도래는 의미심장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동반하며,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요구한다. 이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 세상사에 관한 정보를 얻고, 수천만명에게 정보를 제공하며, 신속하게 교신할 수 있다. 누구나 사회에 관해, 사회를 향해, 발언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회학자인 하워드 라인골드는 첨단 정보통신기술과 연계된 새로운 인간형을 ‘똑똑한 군중’(smart mobs)이라 불렀거니와, 이제 스마트폰은 그 똑똑한 군중을 더 똑똑하게 만들 것이다. ‘모바일 시티즌’이 대거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긍정적인 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보사회화는 개방과 배제, 민주화와 새로운 불평등, 집단 지성과 집단 비이성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정보사회에서 개방화, 민주화, 분권화가 크게 진전되는 경향이 있다는 견해에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이 사회적인 교류와 이성적 숙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활성화할 때 그러하다. 예를 들어 인터넷 커뮤니티에 시사토론방 같은 공론장이 형성되고, 스마트폰이 트위터 등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만나는 경우 등이다.

열린 사회·닫힌 정치 불일치 없게

한국사회는 이 모든 측면에서 정보사회의 첨단을 달리는 나라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유독 정치만 공룡 시대로 퇴행하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에서 정부정책을 비판했다며 처벌하고, 방송사를 길들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시민들의 귀와 입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세계와 교신하는 스마트 시티즌은 무슨 방법으로도 무지하게 만들 수 없다. 관치국가의 스마트폰 열풍에서 나는 열린 사회와 닫힌 정치의 불일치를 본다. 이 불일치가 계속되는 한 한국사회는 계속 시끄러울 것이다. 정치가 사회변화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지, 사회가 통치자의 뜻에 따라 변하는 일은 없다. 복잡하고 역동적인 네트워크 사회, 점점 더 똑똑해지는 시민들에 걸맞은 민주적 협치의 미래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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