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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의 증언: KBS뉴스라인 박상범, 문광부제2차관 박선규 - 오마이뉴스

pudalz 2011. 3. 2. 01:27

꼴보기 싫은 방송앵커들 프로필 - 가끔 뉴스 보다보면 혈압이 상승하거나 인상이 써지는 뉴스를  진행하는 진행자들이 있는데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나 앵커들이 있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진행자들을  떠올려보니 몇 사람이 고정적이었다. 인터넷에서 꼴보기 싫거나 싫었던 방송진행자의  이력을 찾아보았다. 김소원은 얼마전 8시뉴스에서 하차했고 박선규는 현재 문광부 차관이다. 창피도 모르고 전두환찬양했던 현 KBS사장 김인규가 떠오른다.

 

박선규 - YTN 구본홍 안착 압력, MB언론 특보, 언론비서관거쳐 현재 미디어정책 담당하는 문광부 제2차관이다.

 

박상범 - 특정매체 기자들이 짬짜미하던 기자실을 폐지하기로 했을 때 바닥에 퍼질러 앉아 "언론탄압"을 외침, 천안함 보도로 악명이 높음, 요새는 뉴스 시작 때 "이명박 대통령은~~~" 이라고 시작한다.

 

김소원 - 주로 꼴같잖은 뉴스만 전문으로 보도하다가 천안함 눈물보도로  유명세
 

 

 

 

박선규 정무직공무원


출생 1961년 6월 4일 (만49세) | 소띠, 쌍둥이자리 출생지 전북 익산시 

학력

~ 1988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 시기모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언론학 석사

경력

1987년 KBS 입사

1987. KBS 정치부, 사회부 특집부 기자
KBS "8시뉴스" 앵커
KBS 사건25시, 일요진단 앵커
2002 ~ 미국 하원 에드워드 로이스 사무실직원(포털엔 입법보좌관이란다)

2008 ~ 대통령실 언론2비서관
2009 ~ 2010 대통령실 제1대변인
2010 ~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소속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박선규 언론2비서관,청와대 신우회장 취임
http://media.daum.net/culture/religion/view.html?cateid=100028&newsid=20081217175512939&p=kukminilbo
국민일보 | 입력 2008.12.17 17:55

박상범 KBS 뉴스라인 앵커

출생 1968년 11월 13일 (만42세) | 원숭이띠, 전갈자리

1994년 KBS 입사

학력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 86학번

- 스포츠취재부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 등 근무

KBS 5문5답 중

잊지 못할 뉴스
이종점은 왜 도루를 잘할까?라는 제목으로 1루에서 2루까지의 달리는 시간, 발걸음수, 투구에 들어갈때 1루베이스에서의 리드거리, 포수의 송구시간, 슬라이딩이 미치는 영향 등등을 분석한 리포트, 기자 3개월차의 햇병아리 시절 제작한 것인데 당시 편집부장의 칭찬을 많이 받았음 . 그런데 정작 이종범 선수는 이 리포트를 못봤다

 

 김소원 SBS8시뉴스 앵커

출생 1973년 2월 4일 (만38세) | 소띠, 물병자리

1995년 SBS 3기 공채 아나운서

소속 SBS  

학력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2010 제37회 한국방송대상 앵커상


 경력
 1998년 TV 리얼코리아
2000년 뮤직토피아(라디오)
2002년 주말 SBS 8시뉴스
2004년 SBS 8시뉴스

 

김소원 앵커, ‘천안함 사건’ 눈물보도 화제  

 

정연주의 증언: KBS뉴스라인 박상범, 문광부제2차관 박선규 - 오마이뉴스
"자진사퇴만 해주시면, 김인규는 제가 막겠습니다"
[정연주의 증언38] KBS 출신 박선규 전 청와대 대변인 이야기
10.08.12 09:56 ㅣ최종 업데이트 10.08.12 11:21 정연주 (jung46)

2008년 7월 18일 밤 늦은 시각, KBS 별관 근처 술집에서 만난 박승규 당시 노조위원장은 내게 "정 사장은 KBS를 사랑하지 않는군요"라고 이야기했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밤이 되자 폭우가 쏟아졌다. 그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밤 11시가 다 된 늦은 시간에, 아파트 입구로 누군가가 찾아 와 벨을 눌렀다.

 

아내가 실내 모니터를 통해 누구시냐고 물었다. "KBS 후배"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참 낯선 일이었다. 내 집을 찾아오는 KBS 직원은 없었던 터다. 아내가 "KBS 후배 누구시냐"고 다시 묻자 "박선규"라고 답했다.

 

엠시 자리를 간절하게 원했던 박선규 기자

 

  
박선규 청와대 전 대변인
ⓒ 뉴시스
박선규

박선규. 그는 나의 사장 재임 시 KBS 1TV의 <일요진단> 엠시(MC)로도 활약을 했다. 그러다가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는 KBS 프로그램의 엠시 또는 앵커 자리를 정말 간절하게 원했던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2007년 5월 말, 한국기자협회 주최 언론사 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다. 전 해에 이 대회에서 우승한 KBS 팀은 8강에 진출하여 다시 한번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8강전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축구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NFC)에서 있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고 해서, 나는 전 해와 마찬가지로 8강전을 응원하러 갔다.

 

2007년에는 KBS 팀이 8강전에서 '머니투데이' 팀에 지고 말았다. 경기가 끝난 뒤 근방 식당에서 뒤풀이가 있었다. 고생한 선수들과 함께 술 한 잔을 나눴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박선규 기자(1999년 KBS 기자협회장을 지냈음)가 내 옆으로 와서는, 프로그램 진행을 잘 했는데, 왜 <일요진단>에서 내렸느냐, 다른 프로그램에서 엠시 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참 한심한 친구,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KBS 사장으로 온 지 벌써 만 4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프로그램 진행자를 사장이 정하는 줄 알고 있었으니…. 나의 재임시, 프로그램 앵커든, 엠시든, 특파원이든, 모두 각 본부 별로 자율적으로 결정했다. 일정한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따라 투명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1, 2 TV 뉴스 앵커를 정하는 경우에는 뉴스 제작팀 내에서 각 팀원들이 매긴 점수와, 보도본부 팀장들이 매긴 점수를 합쳐서 결정되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보도본부장이 점수를 가장 많이 받은 상위 4~5 명의 성적과, 이들이 실제 뉴스를 어떻게 읽는지를 담은 카메라 테스트 내용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항상 보도본부장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면 예외 없이 최고 점수자를 찍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그렇게 자율적으로 투명하게 뉴스 앵커를 정하고, 특파원을 선발하고, 프로그램 진행자를 정하고, 보도의 자율권을 확대했다. 보도본부뿐 아니라 다른 본부도 마찬가지였다. 사장인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자율의 공간'을 넓혀주는 것이었다. 

 

'자율의 시대'를 거스르는 사람들

 

  
박선규 청와대 전 대변인
ⓒ 뉴시스
박선규

그렇게 자율적으로 앵커와 프로그램 진행자를 결정하는 일이 뿌리를 내렸는데도, 박선규 이 친구, 한심하게도 사장에게 그런 청탁성 발언을 했다(내게 앵커 시켜 달라고 청탁한 한 인물은 또 있었다. 지금 KBS 1TV  오후 11시 <뉴스라인> 진행을 맡고 있는 박상범 기자다. 그는 앵커 응모도 하지 않은 채, 앵커 결정되는 날 즈음, 그 자리를 원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내게 보낸 적이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증언 4'에 나오는데, 그 글에서 나는 앵커 청탁을 한 인물을 그냥 '박○○ 기자'라고만 적었다. 그런데 KBS 뉴스 앵커 가운데 박○○ 기자가 몇이 더 있어, 일반 독자들 가운데는 '엉뚱한 박○○ 기자'를 '인사 청탁을 한 인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음을 나중 알게 되었다. 다른 박○○ 기자들의 명예를 위해 박상범 기자의 이름을 밝힌다).

 

어쨌든 박선규 기자가 KBS의 앵커나 엠시 자리를 그렇게 간절하게 원했던 게 나중에 걷게 되는 '정치인의 길'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뛰어 들었다.

 

2008년 1월 말 또는 2월 1일에 KBS 기자 5명이 사표를 냈다. 4월에 있을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박선규·안형환·신성범 기자가 한나라당 후보를 목표로, 장기철·배종호 기자는 민주당 후보를 목표로 사표를 냈다. 박선규씨는 서울 관악을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 공천에 도전했으나, 공천을 따내지 못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지 두 달 남짓 지난 뒤인 6월 말께, 청와대의 비서실 조직과 인적 구성이 바뀔 때 그는 언론 2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 늦게 내 집을 찾아온 박선규 비서관

 

그러니까 박선규씨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오후 11시께 내가 살던 아파트로 찾아 온 2008년 7월 19일 토요일은, 그가 청와대 언론 2비서관으로 들어간 지 아직 한 달도 안 되던 때였다. 그는 이에 앞서 2주 전 쯤 KBS 내 사무실로 찾아온 적이 있다. 청와대 언론2비서관으로 발령이 나자, 얼마 뒤 KBS를 방문하여 보도본부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그 길에 사장실도 방문했다. 나와 둘이 마주 앉았다. 그는 "사장님 생각을 청와대에 그대로 전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즈음 늘 해오던 생각과 이야기를 다시 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나라에 비로소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의 근본은 마련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희생과 고난을 치렀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그렇게 수많은 희생과 고난을 통해 이룩된 이 민주주의 성과를 훼손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KBS 사장 임기를 지키는 일은 바로 이런 절차적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일이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다."

 

불과 몇 주 전 그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까지 했기에 7월 19일 오후 늦게 그가 내 집까지 직접 찾아오다니, 의아했다. 마음 한 편으로는 이 친구가 공을 세우려 애를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로서는 나의 '자진 사퇴'를 얻어내는 일이 '큰 공'이 될 수도 있었을 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늦은 밤에 내 집을 왜 찾아 왔을까….

 

내 서재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 일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했고, 청와대 안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선배들의 많은 협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나의 '자진 사퇴 가능성'을 물었다.

 

2주 전 쯤 그가 사장실에 찾아 왔을 때는 나의 이야기를 그대로 청와대에 전하겠다며 자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나더러 '자진 사퇴 가능성'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사장 임기에 대한 생각과 원칙의 문제는 이미 지난번 만났을 때 다 했으니, 더 이상 반복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자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사장님이 자진사퇴만 해주시면..."

 

"사장님이 자진 사퇴를 하시면, 김인규 선배가 KBS 사장으로 오는 것은 제가 어떻게든 막겠습니다".

 

  
김인규 KBS 사장
ⓒ 남소연
김인규

그 말을 듣는 순간, 청와대 내 분위기가 이번엔 김인규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맨 먼저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청와대의 한 비서관이, 그것도 MB의 후보 시절부터 따라 다닌 '핵심'도 아닌 처지에, 나의 '자진 사퇴'를 전제로 한다 치더라도, KBS 후임 사장에 김인규 특보 출신을 막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는가. '박선규 언론2비서관'의 힘으로 '특보 출신 김인규 사장'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후에 판명된 대로 청와대가 '김인규 카드'를 잠시 접었을 뿐이었다. 2008년 8월 11일 내가 강제 해임된 뒤 있었던 후임 KBS 사장 공모 때 김인규씨는 공모 마감일 전인 8월 19일 공모에 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뜻밖의 인물'인 이병순씨가 KBS 사장이 되었다.

 

내가 자진 사퇴를 하면 '특보 출신' 김인규씨가 사장으로 오는 것을 막겠다고 하는 박선규 비서관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냥 웃었다. 그리고는 전날 저녁 박승규 노조위원장에게, 그리고 그 즈음 나의 자진사퇴를 이야기했던 인사들에게 했던 말과 거의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KBS 사장 임기를 지키는 원칙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 원칙을 가지고 무엇과 바꾸기 위해 흥정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그랬더니 박선규 비서관 입에서 전날 저녁 박승규 노조위원장으로부터 들었던 말과 똑 같은 말이 나왔다.

 

"사장님은 KBS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군요".

 

참 신기하기도 했다. 어쩌면 저렇게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을까. 서로 종종 만나 그런 이야기를 나눴거나, 아니면 '정연주 체제'에 동의하지 않았던 KBS 수구 세력이 그런 생각과 가치를 공유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더라도 사용하는 단어와 발상이 어떻게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나는 박선규 비서관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 KBS 후배들, 당신과 생각이 비슷한 후배들을 만나 술을 마셨는데, 지금 한 이야기와 똑 같은 이야기를 했다오. 어쩌면 그렇게 사용하는 단어까지 똑같을까".

 

그러면서 나는 그런 이야기 이제 그만 하자고 했다.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보면 그는 다시 그 이야기로 되돌아 왔다. 그러면서 자기가 청와대에서 자리를 잡고, 힘을 얻어야 되는데 선배들이 도와줘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박선규 비서관과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궁중사극'의 주인공이 된 청와대 홍보실 3인방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엄경철) 파업 7일째인 7일 저녁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열린 '시민과 함께하는 KBS 개념탑재의 밤' 시민문화제에서 조합원들이 김인규 KBS 사장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유성호
KBS파업

그는 이듬해 8월 말, 청와대 비서실 개편 때 MBC 앵커 출신인 김은혜씨와 함께 청와대 공동 대변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지자체 선거 이후 최근 청와대 개편 때 이동관, 김은혜씨 등과 함께 3인이 모두 퇴장을 했다. 언론에서는 '궁중사극'으로 알려진 사건 때문에 모두 퇴진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궁중사극' 사건의 내용은 <오마이뉴스> 7월 6일자가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어, 여기에 옮겨 놓는다.

 

"조직 및 참모진 개편을 앞둔 청와대 이동관 홍보수석과 대변인들이 '내부암투' 논란에 휩싸였다. 평소 이 수석에 불만을 품은 박선규 대변인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했고, 김은혜 대변인이 이같은 사실을 이 수석에게 알렸다는 보도가 나오면서부터다. 홍보수석실의 암투 의혹이 제기된 것은 <중앙일보>의 6월 19일자 기사. 당시 <중앙> 기사는 다음과 같이 청와대 내부사정을 전했다. 

 

"최근 A수석 비서관실 소속인 B비서관은 상관인 수석 몰래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A수석실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B비서관의 입장에서 다룬 이른바 '발전방안'을 보고서로 낸 것이다. 청와대 개편을 앞둔 상황인 만큼 이런 행동이 미친 파장은 컸다. B비서관의 직보가 이뤄진 며칠 뒤 A수석은 자신의 조직에 관한 보고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대통령에게 올라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B비서관을 불렀다. 그리고 '왜 이런 짓을 했느냐'며 호통을 쳤다. A수석은 B비서관의 은밀한 보고를 어떻게 알았을까. 같은 수석실의 C비서관이 B비서관의 보고서를 빼내 수석에게 건네줬기 때문이라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밝혔다. 이들 관계자들에 따르면 B·C비서관도 얼굴을 붉히며 언쟁을 했다고 한다."

 

5일 <오마이뉴스>의 확인취재 결과, A는 이동관 홍보수석, B는 박선규 대변인, C는 김은혜 대변인으로 각각 밝혀졌다. 이 수석은 1985년 <동아일보>, 박 대변인은 1987년 KBS, 김 대변인은 1993년 MBC에서 기자 생활을 각각 시작한 언론사 선후배들이다.

 

홍보수석실 사정을 잘 아는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 수석과 박 대변인의 성격 차이가 이번 사태를 일으켰다고 입을 모은다. 두 사람의 갈등 구도에 김은혜 대변인까지 끼어들어 결과적으로 세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구도가 됐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알려드립니다

 정연주의 증언 37편에 실린 '2008년 7월 18일 저녁 박승규 노조위원장과 술자리에 시민사회단체 인사인 양○○이 참석했다'고 기록한 부분에 대해  양○○ 본인이 사실이 아니라고 알려왔습니다. 그렇게 기록한 부분에 대해 독자여러분과 해당 당사자에게 사과드립니다. 당시 정연주 사장이 박승규 KBS 노조위원장이 전화했을 때 "시민사회단체 두 분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고, 그 술자리에 갔을 때 누군가가 양○○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먼저 자리를 떠났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인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혀와 기사 일부를 정정했습니다.

 

 


'원고 정연주' vs '피고 이명박 대통령'
[정연주의 증언 4] 지금 KBS에서는 무슨 일이...
09.09.28 17:22 ㅣ최종 업데이트 09.10.01 09:05 정연주 (jung46)

  
정연주 전 KBS 사장이 7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언론악법 통과뒤 향후 언론지형에 관해 강연하고 있다.
ⓒ 남소연
정연주

'지금의 KBS'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의 답은 이렇다. 나의 개인적인 소회나 평가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시청자, 국민이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의 재임시절 KBS가 '편향적'이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지금의 KBS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볼 것이고, 반대로 과거 KBS가 그래도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어떻게 1년 만에 이렇게 뒤집어지는가라고, 한탄할 것이다.

 

그나마 객관적인 평가라고 한다면 여론조사이겠는데, 최근 나온 여론조사에서는 KBS가 신뢰도 1위 자리를 MBC에 넘겨주고, 영향력도 크게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시청자, 국민의 다수는 '지금의 KBS' 평가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더 많이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반 시청자, 국민은 그러한데, 안에 있는 KBS 구성원들은 어떨까. "정권 바뀌고, 사장 하나 바뀌었는데, 기사 작성의 ABC까지 바뀌어 버렸다"는 어느 KBS 후배 기자의 자조와 절망이 담긴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좀 더 공개적으로는 '어느 KBS 기자가 쓰는 참회록'이라는 글이 인터넷에 나돌았다.

 

최근 KBS의 보도행태에 분노하고, 그로 인해 동료 기자들이 겪는 아픔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글을 올립니다... 사내 게시판에는 연일 절망과 분노로 가득찬 글들이 쏟아집니다....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리고 KBS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노여움을 느끼는 기자, PD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입니다. 최근 KBS의 변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의 언론사에서 신나게 일만 하던, 때로는 좌파 빨갱이라는 욕을 먹어 가면서도 꾸준히 스스로의 길을 걷던 젊은 기자, PD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여러분이 현장에서 마주치는 그 썩을 놈의 KBS 기자, PD들입니다. 대부분 2-6년차 기자, 바로 정연주 사장 재임 시절 들어온 '정연주 kids(아이들)'입니다.

 

KBS 출신 이명박 후보 언론특보들의 활약

 

KBS가 이렇게 바뀌기 전인 2007년 11월 21일.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KBS에 왔다. '질문 있습니다!'라는 KBS 특별 토론그램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 후보 한 명을 상대로 패널과 일반 시민, 누리꾼이 질문하고, 후보가 이에 답을 하는 특별기획 프로였다.

 

이명박 후보는 부인과 함께 방송이 시작되기 20분 전쯤인 밤 9시 40분께 KBS 본관에 도착했다. 그의 주변에는 박형준, 나경원, 정병국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뿐 아니라 언론특보들도 대거 함께 했다. 이들 중 특히 내 눈에 띈 인물은 KBS 출신으로 이명박 캠프에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김인규 방송전략실장(전 KBS 기자), 이성완 TV 토론팀장(전 KBS 시사프로 PD), 양휘부 상임 특보(전 KBS 기자, 현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등이 이명박 후보 주변에 있었다.

 

나와 부사장, 보도본부장이 이명박 후보 일행을 시청자 광장 안에서 맞았다. 이명박 후보뿐 아니라 다른 정당의 후보도 시청자 광장에서 맞았다. 선거철에는 특히 민감하여, 어떤 후보는 마중을 하고, 또 어떤 후보는 마중을 않을 경우 시비가 일기 때문에 정당의 대선 후보는 가리지 않고 마중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차OO KBS 시청자센터장은 지난해 11월 21일 밤 11시 생방송 '질문 있습니다!'라는 KBS 특별 토론그램에 출연하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에게 생방송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자연스럽게 하세요"라고 조언(?)을 했다.
ⓒ PD저널
이명박

이날이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그날 차OO 시청자 센터장의 행태가 유별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명박 후보가 생방송 토론에 들어가기 직전 이 후보에게 "자연스럽게 하세요"라고 애교 섞인 조언을 하는가 하면 토론 사회자인 정관용씨와 이명박 후보가 생방송에 앞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에도 이명박 후보 바로 옆에 붙어 서서 귀를 쫑긋하는 장면이 사진에 찍혀 이튿날 <PD 저널>과 <오마이뉴스>에 크게 등장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행태를 두고 KBS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다. 사내 게시판에는 이명박 후보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하는 모습이 추하다며 그의 행태를 비판하는 글이 많이 올랐다.

 

바로 이런 분이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겠다"는 나의 발언이 있은 다음날  "(한국방송) 공사 안팎에선 작금의 편파 방송이 광기를 띠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하면서, 자동 보직해촉을 18일 앞두고, 보직 사표를 던지며 기자회견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봄, 총선 때 고향인 경북 어느 지역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최근에는 <조선일보> 보도를 통해 그의 부끄러운 행실이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난 8월 29일자 8면 머리기사에서 이런 내용이 전해졌다.

 

차 씨는 작년 총선 직전 모 건설업체 대표 S씨에게 '프랑스 뮤지컬 공연단 초청 사업을 하면 KBS가 도와주게 할 테니 출마를 도와 달라"고 부탁해 1억 원 상당의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차 씨는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려 했으나, 공천에서 떨어졌다... 차 씨가 대선 직후엔 '이명박 후보에게 당선축하금을 줘야 한다'면서 S씨에게 3000만원을 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 교양 PD 출신인 차 씨는 2007년 대선 직전 이명박 후보 지지 발언으로 논란이 일자 KBS를 떠났다.

 

이 기사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얼마 뒤, 불구속 기소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인물들이 중요직책을 맡고 있으니...

 

차OO 센터장과 함께, 평균 연봉 1억 원 안팎의 '귀족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가진 '공정방송노조'(1직급 노조)의 대표를 지냈고, '녹취록 파문' 때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의원님, 한 배입니다. 좌초되면 저희는 죽습니다"라고 했던 윤OO 전 KBS 심의위원은 지금은 편성본부 외주제작국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디 윤OO뿐이겠는가. 이명박 후보의 방송특보를 지낸 김OO의 사내 조직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온 '수요회'의 주요 멤버들 상당수가 지금 요직을 맡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내가 2003년 4월 취임사에서 정치권에는 절대 인사 청탁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는데도, 1주일도 채 안 돼 당시 민주당 거물급 정치인을 통해 인사 청탁을 해온 '간 큰' 인물도 있었다. 나는 바로 다음 인사  때 그를 (보도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한직으로 보내보렸다. 그 일로 (나와 감방동기인) 그 민주당 인사는 그 뒤 나를 만날 때마다 '독한 사람'이라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런 인사청탁을 한 인물인 김00은 '귀족 노동자' 단체인 '공정방송노조' 공동 위원장을 하면서 윤OO와 함께 '반정연주' 대열에 앞장 섰으며, 나의 해임 이후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그가 2003년 5월, 민주당 거물급 정치인을 통해 청탁했던 자리는 '해설위원실장'이었다.

 

또 2TV '뉴스광장' 앵커 공개 모집 때 응모도 하지 않았던 인물이 앵커를 결정하는 날, 느닷없이 내게 '뉴스광장 앵커 교체 관련'이라는 제목으로 된 이메일을 보내 앵커시켜 달라고 졸라 댄 박OO 기자라는 '간 큰' 인물이 또 있었다. 당시 보도본부에서는 앵커를 공개모집을 했으며, 팀장 투표, 관련부서 투표 등을 통해 최고 점수를 받는 기자 또는 아나운서를 앵커로 뽑았다(아마도 박OO 기자는 사장이 앵커 결정에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특파원 결정이건, 앵커 결정이건, 사장인 내가 개입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공개 모집 절차'라는 시스템을 통해 결정했을 뿐이었다. 나는 '제왕적 권력'을 가졌다고 흔히 비판받아 온 KBS 사장자리를 '가장 힘 없는 자리'로 만들겠다고 취임 초기부터 공언을 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이런 공개모집의 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채 박OO 기자는 앵커 결정 당일날 아침 내게 이메일을 보내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뉴스광장 업그레이드에 힘을 쏟겠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기자협회장이던 그는 박승규 노조 출범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KBS 보도본부 내에 소문이 나있었으며, 지금은 그의 소원을 풀어 앵커가 되었다. 누구에게 이메일을 또 보냈는지, 궁금하다.

 

이런 인물도 있었다. 내가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을 때 KBS 특파원으로 함께 워싱턴에서 일했던 오00는 내가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 회계부정으로 6개월 정직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회계부정의 성격으로 보면 파면, 해임 감이었으나 6개월 정직으로 살아남은 행운아였다. 그는 지금 KBS 1라디오의 주요 프로를 맡고 있다.

 

예를 들어 본 몇 몇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부류가 요즘 KBS에서 속된 말로 잘 나가는 인물들이다. 그러니 신뢰도 1위가 가능하겠는가.

 

이런 부류로 상징되는 인물들과 얽히고 설킨 이야기들, 3년 8개월 동안 줄기차게 '반 정연주'를 외친 진종철, 박승규 노조의 실체, 5년 4개월 KBS 재임 기간 중 이루려 했던 꿈과 그 가운데 일부를 이뤘을 때의 보람, 그리고 수많은 좌절과 실패, 그 속에서 절절하게 느낀 나의 한계, 공영방송의 공적 가치... 그런 이야기들을 증언하고자 한다. 그러한 증언을 통해 KBS의 어제와 오늘의 실체가 어느 정도 보일 것이며,  KBS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리사회의 문제, 모순, 한계, 희망 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KBS가 여러 면에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며, 그러기에 'KBS 이야기'는 단순히 KBS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원고 정연주 vs 피고 이명박 대통령

 

  
▲ 해임무효 소송자료 표지 '원고 정연주' '피고 대통령'이라고 밝히고 있는 해임무효소송기록 표지. 아직 1심이 끝나지 않았다
ⓒ 정연주
정연주

'KBS 이야기'의 가장 절실한 대목은 아무래도 나의 사퇴, 해임 압박을 둘러싼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 이야기의 한가운데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있다. 지난해 8월 11일,  KBS 사장인 나를 해임한 당사자는 이명박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진행중인 '해임처분 무효 확인소송'의 당사자는 '원고 정연주' '피고 대통령'으로 되어 있다. 묘하게 운명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사적으로 얽혀 있는데다, 이렇게 해임당사자로 공적으로도 얽혀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인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돈 간이다. 내 사촌 형님의 처 이모 아들, 그러니까 사촌 형수의 이종사촌이 이명박 대통령이다. 내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해직되고, 70년대 후반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며, 80년대 초에는 5.17 이후 수배되어 1년 가까이 도망자 신세가 되는 등 험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친척들과 자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82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 가 거기서 18년을 지나는 통에 사촌 형수의 이종사촌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이명박 대통령과 사돈 간이라는 사실도 지난해 알게 되었다.

 

서로의 고향으로 치면 참 가까운 거리다. 이명박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경북 포항 북쪽의 흥해에서, 내가 태어난 경북 월성군(지금은 경주시) 강동까지는 거리가 40리(16km)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강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가족이 모두 경주로 옮겨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그런데 중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경주와 포항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인근에 있는 시골의 고만고만한 도시, 읍내 사이에는 흔히 라이벌 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경주-포항 사이도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예를 들면 경주-포항의 고등학교 사이 축구나 농구 경기가 있을 때면, 서로 방문지에서 험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포항 팀이 경주에 오면 혼이 났고, 경주 팀이 포항에 가면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는 "경주 모기하고 포항 모기하고는 절대 사돈 삼지 않는다"는 농담도 있었다. 바닷가인 포항 모기가 양말을 뚫을 정도로 드세기도 했지만, 경주와 포항 사이 경쟁심리 탓일 터다.

 

작년에 나의 사퇴, 해임 압박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 어느 누리꾼이 "포항 사람과 경주 사람이 왜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게 싸우냐"고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을 보면서 나는 쓰게 웃었다. 포항 모기와는 사돈도 맺지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