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뉴스/그 외 짬뽕

환원주의의 오류

pudalz 2010. 4. 3. 03:44

'환원주의의 오류'란 말의 용례(용어사용의 사례)

 

생태학적 오류와 개체(인)주의적 오류 by 남진우

분석의 단위와 관련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자료를 해석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생태학적 오류(ecological fallacy)이다. 생태학적 오류란 개인보다 큰 집단에 관한 조사에 근거해서, 개인에 관한 결론을 내릴 때 생기는 오류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개체(인)주의적 오류(individualistic fallacy)란 개인적 특성에 대한 정보를 통해 그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흡연을 하고도 건강하게 장수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금연을 할수록 건강하다는 일반적 양식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조사연구에서 분석의 단위를 명확하게 규정해야 하는 이유는, 생태학적 오류나 개체주의적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 많은 조사연구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식의 오류들은 분석의 단위에 대한 정확한 인식만 갖춘다면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환원주의 오류에 개체(인)주의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즉 환원주의 오류가 더 넓은 개념이다. 환원주의 오류에는 개인주의 오류뿐만 아니라 변수를 너무 좁게 잡은 오류도 있다. 예를 들어 사회현상을 진단하는데 심리학자가 심리학적인 측면만 보는 것이나, 경제학자가 경제학적인 측면만 보는 것이다. 사회문제를 진단할 때 심리변수는 물론 경제변수, 정치변수 등 다각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데, 너무 변수를 좁게 잡은 것이다. 즉 개체(인)주의적 오류는 분석단위에서 오는 오류이고, 환원주의적 오류는 변수선정에서 오는 오류입니다. 남진우의 행정학교실

 

 

복거일 한 자유주의자의 오만과 편견 by 한수영
경제 환원주의의 허와 실

자유주의가 가장 바람직하고 보편 타당한 이념인 까닭은?
복거일은, 그것이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도 갖지 못한 경제학적 계산 장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상조차도 경제적 관점으로 해결을 시도해야 문제점과 대책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자신과 다른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조건을 비중있게 다루는 것은 '경제 환원주의'이고,
자신의 주류경제학에 대한 맹신은 '경제 환원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 모순적인 발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실제로 그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진단하고 분석할 때에 심각한 경제 환원주의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일체의 태도를 싸잡아서 '민중주의적 신비주의'로 폄하해 버린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의 경제학적 계산장치를 동원하지 않은 일체의 학문적 분석방법과 태도는, 사람들의 냉철한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호소하는 논리적 방법이 아니라) 즉흥적인 열정과 근시안적인 이해관계에 호소하는 (선동과 충동에 기대는) 직관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사회적 문제의 원인 분석과 그 해결의 모색은 신중할수록 좋다.
그리고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막연한 추정이나 감정에 기댄 분석과 대안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욱 미궁으로 몰아간다. 그점에서
복거일의 ...메시지는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다.
실제로 우리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자주 선정적인 여론, 선입관, 인습적 정서에 시달려 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사회구성원들의 급박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욕을 먹더라도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 이의를 달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제외한 모든 이념들을 몽매한 '신비주의'로 싸잡아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 하나, '계랑화된 지식' 을 구사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기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책 The FATAL CONCEIT에 담긴 함의란?

사회적 문제에 계량화된 지식과 자유주의의 계산 장치를 동원하여 접근하는 복거일의 분석과 대안은 과연 얼마나 우리를 설득시킬 수 있을까?

그는 민주화도 재화로 다룰 것을 제안한다. 통일도, 주한 미군도, 대학 입시도, 정치도 모두 재화의 수급 문제로 환원시켜 시장 경제의 원리에 대입시켜 분석하자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면 선동적이고 추상적인 걸림돌들이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는 한국 군대의 궁극적인 형태는 외국 용병을 들여 오는 것이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라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군대의 자유화뿐 아니라 사회의 자유화에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진단과 처방 237~247쪽) 주한 미군이 한국의 방위라는 본래의 목적을 벗어난 일을 위해 동원될 때는 감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제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 한다.

용병이란, 말 그대로 필요에 따라 고용한 병사라는 뜻이다.용병은 당연히 고용한 주체인 주인의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 즉 미군이 용병이 되기 위해서는 미군을 고용한 우리의 '주인다움'이 무엇보다도 먼저 전제되야 한다. 주인이..용병의 눈치를 볼 때 주인과 용병의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한미행정협정'.... 

 

결과를 전제하고 그곳에서 역추적하여 원인을 밝혀내려는 태도는 자칫하면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져들거나 동어 반복에 그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이 글은 이와 같은 방법른적

 

 

하우저(Arnold Hauser) 등에게서발견되는 값싼 사회학적 환원주의의 오류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면, 사회학자는

 

아스만은 린 화이트 류의 생물중심주의(biocentrismo)가 역사를 소홀히하는 극단적이고 신비적인 자연주의에 빠지는 또 다른 환원주의의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유전자 결정론이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마치 어머니의 사진을 구성하는 각 도트의 색깔을 정확히 분석하기만 하면 왜 우리가 어머니를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특히 유전자 조작으로 열등한 인자를 도태시키고 우등한 집단을 만들려는 우생학적 인간 개조 프로그램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 결정론은 대단히 위험하다.

 


살벌한 정치세계를 넘 단순화 한 거 아니냐는 비난들도 있는 거 안다. 하지만, 적어도 내 판단에서 '환원주

의의 오류'는 크지 않았다고 본다. 따지고보자면... 현실정치라는 게 단순하게 생각할 일을 굳이 쓸데없는

미사어구

 

모든 것은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라고 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환원주의의 오류를 논증하는 가운데 헨리 마지노라는 물리학자의 대중물리학저서에서 요약한 내용이 바로 열역학과 뉴턴역학의

 

인간의 본성들
인간의 본성을 만드는 것은 유전자인가, 문화인가?
신수연 기자  syshin@jknews.co.kr
2008-04-23 17:22
본성이 아니라 본성‘들’

세상에 흉악 범죄들이 기승을 부릴 때마다 흔히들 인간의 본성을 탓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격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인한 동물이며, 그러한 인간의 본성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체념에는 한 가지 가정이 깔려 있다. 즉 인간은 유전자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는 단일한 고정불변의 본성을 타고난다는 것. 그러나 <인간의 본성들>은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인간 본성이란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제목에서도 강조되듯이 시종일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본성들(natures)’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한다. 실제로 우리의 본성(호모 사피엔스의 신념, 태도, 행동의 패턴)은 개인마다 사회마다 다르다. 베이징에 사는 중국인의 인간 본성과 파리에 사는 여성의 인간 본성은 같지 않으며, 도시 불량배의 본성과 경건한 기독교 집안 아이의 본성은 같지 않다. 저자는 인간 본성의 이러한 다양성, 차이를 강조하며 우리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저 사람은 왜 나와 다른가?’ ‘당신의 본성은 나의 본성과 어떻게 다른가?’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은 바뀔 수 있으며 바뀌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의 본성은 불과 몇십 년 전의 우리의 본성과는 많이 다르다. 인간 본성은 진화해왔으며, 그 자체가 진화의 산물이다. 진화의 시계에 비추면 찰나에 불과한 수백만 년 동안,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벌레를 잡아먹던 인간조상의 본성으로부터 우리는 사고와 언어, 도구와 문명을 발달시켰고 우리의 본성 역시 진화시켜온 것이다.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인간 본성’이란 생각은 현대 유전학의 성과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유전자가 우리의 본성을 결정한다는 이 단순명쾌한 논리에 힘입어 암 유전자에서 동성애 유전자, 범죄 유전자, 비만 유전자, 최근의 행복 유전자까지 과학자들의 발견 목록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유전자가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을 결정하기에는 수적으로 절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밝힌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를 당초대로 10만 개라고 한다면 (그러나 최근에는 벼보다도 적은 2만 5000개쯤으로 대폭 줄었다), 우리 뇌의 1조 개 이상의 뉴런이 만들어내는 100조 이상의 시냅스를 조절하려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도 유전자 하나당 적어도 10억 개의 시냅스를 담당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유전자가 기본적인 신체 유지 활동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유전자 결정론이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마치 어머니의 사진을 구성하는 각 도트의 색깔을 정확히 분석하기만 하면 왜 우리가 어머니를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특히 유전자 조작으로 열등한 인자를 도태시키고 우등한 집단을 만들려는 우생학적 인간 개조 프로그램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 결정론은 대단히 위험하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해묵은 본성/양육(nature/nurture) 논쟁에 대해서도 한마디로 무의미하다고 잘라 말한다. 본성과 양육, 유전자와 환경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물음은 삼각형의 면적을 낼 때 밑변과 높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묻는 것처럼 어리석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전자’ ‘환경’ ‘유전자-환경의 상호작용’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우리의 본성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인간 본성, 문명의 미래에 대한 고찰

인간과 유인원의 공통조상이 나무에서 내려와 일어서고 뇌가 커지고 도구를 사용하고 급기야 언어를 발달시키기까지 수백만 년이 걸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불과 5만 년 전 시작된 문화 대약진으로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인간은 지구를 지배하는 생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는 문화적 진화가 유전적 진화에 비해 엄청나게 빠름을 시사한다.

이러한 두 진화의 속도 차는 현대문명이 처한 곤경의 이유를 설명한다. 지구온난화와 생물다양성의 감소 같은 이제까지 우리를 지탱해온 생명부양시스템의 위기는 환경을 통제하는 인간의 능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나 그 힘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편의주의와 환원주의에 기초한 무분별한 살충제와 항생제의 남용은 해충과 박테리아의 저항성만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저자는 인간의 지각체계를 생태학적 사고로 진화시킬 때에만 사회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불가능한 유토피아일까? 저자는 지난 세기의 민주주의의 확대, 개인 자유의 신장, 인종차별 철폐, 종교적 관용과 여성과 동성애자의 권리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문화적 진화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본성을 명명백백히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어도 더 많은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의문만 생겨날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인간 본성은 철학적 사변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물학에 의해서, 곧 인간 진화 맥락에서만 올바로 접근 가능하다. <이기적 유전자>나 <빈 서판>처럼 유전자를 중시하면서도 <총 균 쇠>처럼 환경의 의미를 놓치지 않는 이 균형 잡힌 저작은 결국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합학문으로서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된다. (폴 에얼릭과 윌슨이 함께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로부터 노벨생물학상 격인 크라포르드상을 공동수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20년 더 나중에 나온 만큼 최근의 과학적 연구 성과가 잘 반영된 새로운 사회생물학 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지은이 : 폴 에얼릭

재경일보

 

유전자 환원주의로 치닫는 생물학 결정론의 심각한 오류들

『인간 본성에 대하여』 에드워드 O.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7

개미연구의 전문가만이 아니라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로 유명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는, 1971년과 1975년에 각각 출간된 『곤충사회』와 『사회생물학』과 함께 3부작을 구성하는 저서이다.

1978년에 발간된 『인간 본성에 대하여』는, 저자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줄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나 한국독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다.

최근에 미국의 곤충학자 윌슨이나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도킨스와 같은 생물학결정론자의 과학서적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급증했다. 이는 IMF 이후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의 재편이 강제되고, 생명공학이 21세기를 주도할 경제성장 동력기술로 부상한 시대적 상황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곤충사회』는, 개미와 흰개미 및 꿀벌과 말벌 등 사회성 곤충들의 행동유형과 집단동태를 밝혀낸 연구서이다

 『사회생물학』에서 윌슨은 연구대상을 대폭 확대해 곤충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서 공격성과 호전성, 협력성과 호혜성, 배우자 선택과 짝짓기, 자녀 돌보기와 부모의 희생 등과 같은 성향과 행동이 존재함을 관찰함. 이러한 사회적 성향과 역학적 행위은 개체들 각자에게 내장돼 있는 유전요인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주장을 피력했으며,  개체보존이 아닌 유전자보존 차원에서 이뤄지는 자연선택의 진화론이 타당하고, 인간행위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접근방법으로서는 생물학에 의한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통합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사회생물학』은 자연선택의 다윈주의 진화론에 기초한 유전자결정론과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자연과학으로의 통합론 두 가지의 이론 때문에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반대자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는 의도에서 윌슨이 기획하고, 저술한 책이 바로 『인간 본성에 대하여』이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는 인간의 행동에 내재돼 있는 본질에 해당하는 특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와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됐는가를 설명해줄 종합과학으로서 사회생물학의 과학적 지위에 대한 메타과학 차원의 논의들로 채워진 저작이다. 모두 9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인간 본성에 대하여』중에 유전자결정론과 학문통합의 문제만을 주로 언급하고자 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두 가지 딜레마의 형식으로  제시한 제1장은,

생물학적 진화라는 유전자의 목적에만 충실한 존재다.

자기생존과 자기확대라는 내재적인 목적 말고는 그 어떤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인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이다

내재적인 목적 말고도 외재적인 도덕적 가치와 정치적 실천을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타의 동물종과의 비교의 관점에서 분석한 5장에서 8장에서는 수백만 년에 달하는 진화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상태에 도달한..............

공격성과 투쟁성, 성결합과 성기능, 이타성과 자기희생, 신앙과 종교와 같은 인간행위의 특성도 특정의 자연환경이나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과잉발달하거나 이상 발달한 인간본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본성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해석에는 어느 정도 타당한 면이 있다. 그와 동시에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첫째,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기인하는 인간의 행위와 성향, 기질과 태도의 원인을 유전자로 오인한 문제이다. 둘째, 노예제도의 폐지원인을, 집합적 정치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유전자의 부적합성으로 분석한 오류이다. 그 결과 기존의 사회불평등구조를 정당화하거나, 현상타파의 모든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는 문제이다.

다섯째,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유전자결정론으로 흐른 문제이다. 생물종을 ‘유전자의 우연과 환경의 필연에 의한’ 결과물로 파악할 정도로, 저자가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중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의 두뇌작용도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촉진하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나갔던 것이다. 기계론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저자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은 결코 유전자의 생존과 확장을 촉진하는 기계장치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생명유지의 본능적이고 반복적인 활동에 한정되지 않는 창조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및 현재와 미래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자기정체성을 형성하고 확인하는 의식이다.

그런데도 유전자 환원주의로 치닫는 생물학결정론은, 발현여부가 불확실한 유전자차별로 불평등현상을 심화시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작용과 위험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유전자조작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유기체를 상품화하고 수단화하는 자본과 권력의 하수인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수신문 by 금인숙 충북·사회학대 editor@kyosu.net

 


해방신학과 생태 문제

김항섭(우리신학연구소)


1. 기독교는 생태 위기에 책임이 있는가?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뿌리}(1967년) 라는 저서에서 '올바른 환경운동을 하려면 자연 황폐에 큰 책임이 있는 유대교-기독교 전통과 근본적으로 단절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적지 않은 여성 생태신학자들은 유대교-기독교의 창조신화가 무질서적인(chaotic) 여성적 원리를 무너뜨리고 제거한 질서중시적인(orderly) 남성적 신의 승리라고 규정짓는다(Hugo Assman, {도전과 기만}, 55쪽). 이에 반해 메츠(J. B. Metz)는 기독교가 생태 문제를 다루는 것은 교회의 '보완적인 윤리적 의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라고 주장한다. "정의, 평화와 창조 보존은 기독교 교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토대"이고 "땅이 없으면 하늘도 없다"고 강조한다({Concilium}, 236호, 8쪽).

이러한 상반된 주장 앞에 해방신학은 전자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도 이 비판이 성서, 특히 창세기에 대한 잘못된 이해 바탕한다고 지적한다. 린 화이트 등은 창세기의 '땅을 정복하라'(1장 28절),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다(1장 26절) 등의 성서 구절에 바탕해 기독교 전통이 자연에 대해 완전히 냉담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보프는 이 창세기 1장을 해석할 때 거의 3천년 전에 쓰여진 이 본문의 문화적 틀과 오늘날의 문화적 틀의 차이를 고려해 해석해야 하고 창조와 인간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른 창세기 본문(2장)과 관련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본문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간을 에덴 동산으로 데려가 동산을 '가꾸고 보존하도록'(돌보도록) 했다(2장 15절 참조). 여기서 "인간은 자연의 친구이고 자연과 더불어 일하며('돌보다'의 의미) 자연을 보존하는 '선한 천사'이지 '땅의 정복자'가 아님이 명백하다"({생태, 세계화와 영성}, 46-47쪽)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2장 본문은 1장 본문에 일정한 제한을 가해 창조와 인간 사명의 참 뜻을 드러낼 수 있었으나 권력과 파라오적 사고를 지향하는 서구 문화 맥락에서 받아 들여질 수 없었고 따라서 죽은 글이 되거나 관념화되었다. 보프는 또한 오히려 이 본문들보다는 육체와 세상을 경시하고 쾌락과 성과 여성적인 것을 불신하며 세상과 무관한 하느님을 선포하는 기독교 내 지배적인 신학전 전통이 인간의 자연 파괴에 더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보프는 또한 기독교 전통에서의 이러한 부정적 요소들을 상쇄하는 "긍적적 요소들, 즉 육화 신비, 성사, 특히 성체성사를 통한 물질 긍정, 세상과 물질과 인간의 육체적 변모로서 부활, 하느님의 표지를 간직하는 우주의 성사적 특성, 존재들을 형제자매로 맺어주는 창조 신비, 프란시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 실천한 감동적인 형제애 신비"(같은 책, 47쪽) 등을 오늘의 상황 속에서 복원해 내면서 올바른 생태 질서 수립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스웨덴 출신 신학자로 83년부터 코스타리카의 DEI 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헷슈트룀(Ingemar Hedström)도 땅은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창조한 '집'이고 우리 인간은 이 집의 '선한 관리인'이라는 것이 창조의 참뜻이라고 주장한다({우리는 대균형의 일부이다}, 97쪽). 그러나 보프와 달리 이 창세기 2장에 대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그에 따르면 19절(아담이 동물 하나 하나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간의 활동 대상으로 여김을 의미한다(같은 책, 99쪽).

구티에레스, 후벵 알베스 등과 더불어 해방신학을 일구었고 힌켈라메르트와 함께 경제신학을 주도하는 우고 아스만(Hugo Assman)은 보다 더 솔직하다.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 특징을 갖는 인간중심주의 형성에 기독교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주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어쩌면 이 인간중심주의가 '현실 성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단순히 성서 왜곡으로 간주해버리면 논의의 끝이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 기독교의 일부를 형성하는 폭력적이고 희생적인 특징을 갖는 수많은 왜곡을 해독해내야 하기 때문이다"({도전과 기만}. 따라서 아스만은 이러한 성서 왜곡의 악영향을 부인함이 없이 창세기 1,1-2,4(사제적 문헌)을 더 먼저 쓰여진 2,4-25(야휘스트 문헌)의 관점에서 언급하고 비판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과제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아스만은 린 화이트 류의 생물중심주의(biocentrismo)가 역사를 소홀히하는 극단적이고 신비적인 자연주의에 빠지는 또 다른 환원주의의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해방신학은 생태 문제를 방치했는가?


매덁 폭스(Matthew Fox)는 해방신학이 당장 긴급한 문제, 즉 제3세계 주민의 단순한 생존 문제에 몰두해 여성 문제, 생태 문제 등이 갖는 도덕적·전략적 중요성을 과소평가했고 가부장적 인간중심주의에 압도되었다고 비판한다({Criation Spirituality}, XI쪽).

이러한 비판에 대해 우고 아스만은 비참이나 가난보다 더 반생태적인 것은 없다고 못박으면서도 명백한 생태학적 언어를 구사하는 논의 부재라는 점에서는 이 비판에 겸손한 개방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스만은 "해방신학의 중심 주제는 생명의 긍정이고 '죽음의 세력'에 반한 투쟁이며 이것은 생태학적 문제를 완벽하게 포용할 수 있는 기준의 모태를 이룬다"({도전과 기만}, 59쪽)고 주장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생태학적 논의를 보려면 먼저 삶의 신학을 주도적으로 전개해 온 경제신학적 논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3. 경제신학과 생태 문제


경제신학은 '생명의 하느님', '삶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기독교 전통에서 출발한다. 즉 하느님이 생명의 하느님이라면 또한 인간 생명(삶)의 하느님일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구체적 삶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이 가능성에서 소외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 삶의 파괴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서의 파괴를 의미하지만 물질적 요소의 소외가 없는 가난은 없기 때문에 삶의 하느님은 또한 삶의 물질적 요소의 하느님이기도 하다. 그런데 물질적 요소의 생산과 재생산을 다루는 것이 경제이므로 신학은 모두를 위한 삶(가난한 이들의 선택은 '우선적'인 것이지 배태적인 것이 아니다)이라는 기준 하에 현실 경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판단이라는 과제를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 출신으로 60년대 이후 중남미에서 활동해 오고 있는 프란스 힌켈라메르트(Franz Hinkelammert)는 특히 자본주의 경제의 물신성과 그에 따른 인간 희생에 대해 비판한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자본 물신은 단지 인간 희생에 그치지 않고 자연 파괴도 가져온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이를 위한 삶이라는 대전제 아래서 사도 바오로의 육체 개념 -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육체적 연계 - 과 맑스의 자연관 - 인간은 자연의 일부, 즉 자연적 존재이고 자연은 인간의 확장된 몸, 객관화된 사회관계이다 - 에서 출발해, 자본의 논리에 내재된 자연관과 그에 따른 자연 황폐와 파괴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의 자연은 "지극히 상품적인 자연이고 구체적 현실로서의 자연은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상품의 역동성에 일치하는 법이 자연법이다. 이 상품적 자연에서 자유는 가격과 기업의 자유이다. 이 자연은 인간의 구체적 삶의 가치들을 오히려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사실상 그 존재를 부인한다. … 구체적 현실로서의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는 인간이고 사용가치인 것에 반해 이 기업가적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는 가격, 상품, 기업이다."({죽음의 이데올로기적 무기}, 1977, 165쪽).

이러한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기업들의 경제 전쟁은 단지 인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자연도 파괴한다. 즉 '초토화하는 전쟁'이다. "현재 제3세계에 거대한 삼림토벌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들은 이미 사막으로 변해 버린 고향 땅을 얼마 전에 등진 수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사하라와 이디오피아 지역의 굶주림 문제는 서로 간에 전쟁을 벌이는 자본주의 기업들의 이러한 땅 파괴에서 오는 결실이다."(같은 책, 161쪽).

따라서 이러한 자본의 논리는 인간과 자연의 삶을 진정으로 보장하려는 이들을 비난하고 공격한다. 이 논리는 "제3세계 국가들이 삶의 토대로서 자연을 보호하고 돌보는 것을 '자연에 반하는 행위'로 본다. 따라서 국제통화기금은 시장개방을 통해 자유로운 자연 약탈을 허용할 때까지 제3세계 국가들을 계속 공갈 협박할 것이다."(같은 책, 166).

힌켈라메르트는 이러한 비판에 바탕해 이윤을 경제적 결정 기준으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나 경제성장을 기준으로 삼는 사회주의 경제와 다른 대안적 경제, 즉 완전고용과 소득재분배를 통해 인간 삶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환경보호, 산업발전과 평화라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형태의 계획경제를 주장한다({민주주의와 전체주의}, 1987, 1부 3장 참조).

경제신학 외에도 베네수엘라의 뻬드로 트리고는 {창조와 역사}(1987)라는 저서에 명백한 생태학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창조와 가난한 이들의 선택 사이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올바른 생태신학적 관점의 싹을 틔운다.


4. 해방과 자연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계시는 역사에서 이뤄진다. 자연은 이 역사가 실현되는 곳이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언급없이 환경에 관한 어떤 성서 사상도 전개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 속에서 체험한 하느님은 해방하는 하느님이었다. 따라서 성서의 자연관은 인간, 특히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밀접한 관련 하에 전개된다.

자연은 모든 이의 삶과 자유를 위한 이스라엘 백성의 투쟁 과정에서 '희망의 동반자와 투쟁의 동지'(Luis Mosconi, "… 나무들이 손뼉을 치리라(이사야 55,12)", 50쪽)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자연관은 출애굽에서부터 나타난다. 에집트의 착취와 억압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길을 열어 준 홍해 이야기, 가나안 땅을 향한 고된 행진 도중 마라에서 쓴물이 단물이 되어 목마른 백성의 목을 축인 이야기(출애굽, 15,25), 만나로 굶주림을 채운 이야기(출애굽 16,13-30) 등. 이처럼 자연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와 삶을 향한 모험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 어머니였고, 아버지였고, 투쟁의 동반자였다"(같은 논문, 51쪽).

해방신학자들은 인간과 자연의 이러한 관계의 풍부한 실례들을 억압과 착취에 반해 일어섰던 예언자들의 글에서 찾는다. "하늘아, 기쁨으로 외쳐라 …. 땅 속 깊은 곳아, 큰 소리로 외쳐라. 산아, 숲과 모든 나무들과 함께 기쁨으로 외쳐라. 왜냐하면 야훼께서 그의 백성을 구제하셨기 때문이다"(이사야 44,23). "하늘아, 기쁨으로 외쳐라! 땅아 기뻐하라! 산들아, 기뻐 소리를 질러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고 그 천대받은 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이사야, 49,13). 즉 백성이 자유로울 때 자연도 자유롭다.

이러한 자연관에서 볼 때 자연의 황폐는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언자들은 자연의 황폐를 논하면서 사람들의 태도에서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원인들을 발견했다. 예언자들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자연 착취와 그 황폐화를 발생시켰다고 보았다"(Tea Frigerio, "환경에 관한 성서적 성찰 시론", 41쪽).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느님을 알아 주는 자 또한 없어 맹세하고도 지키지 않고 살인과 강도질은 꼬리를 물고 가는 데마다 간음과 강간이요,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때문에 땅은 메마르고 주민은 모두 찌들어 간다. 들짐승과 공중의 새도 함게 야위고 바다의 고기는 씨가 말라 간다(호세아 4,2-3).

브라질의 산드로 갈라지(Sandro Gallazzi)도 다니엘서를 분석하면서 다니엘이 6일동안 동굴 속에서 사자와 지내면서 모든 피조물과의 평화라는 낙원적 만남을 실현한 것은 예언자들의 갈등없는 세계에 대한 꿈, 특히 이사야서 11장 6-8절에서 모든 갈등의 원조격인 뱀까지 자기 자리를 갖고 더 이상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꿈의 실현이고 이는 신약에서 마르코 복음사가에 의해 "그 동안 예수께서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13)로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성서에서는 하늘과 땅, 천사, 짐승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선을 위해 협력한다. 그러나 갈라지는 이러한 생태적 평화가 "고도로 그리고 반드시 정치적인 것이다. 모든 억압 형태에 반해 야훼와 야훼 프로젝트에 충실하는 자에 의해 획득되는 평화이다"("주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주셨고 죽음의 손에서 빼내 주셨다(다니엘 3,88)", 21-22쪽)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모스꼬니는 결론적으로 성서의 사상을 이렇게 정리한다. "a) 보다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들, 억눌린 이들의 해방이다. 이 해방은 자유로운 삶을 갖는 백성에 관한 프로젝트이다. b) 자연은 거기서 백성의 삶과 자유를 위해 봉사하고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 … 따라서 삶과 자유를 위한 가난한 이들의 투쟁 전망에서 모든 생태 문제를 보고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망에서 벗어나면 남용, 왜곡, 조작이 있게 된다. 발전, 이윤에 대한 우상숭배가 생겨 난다. 또한 자연에 대한 정적인 관점을 갖게 된다. 여기서 자연은 박물관에 보관된 한 작품으로 축소된다. 손댈 수 없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나무들이 손뼉을 치리라(이사야 55,12)", 51쪽).


5. 창조와 인간의 사명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과 착취의 유배지에서 새로운 출애굽,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꾸면서 이를 창세기에 담는다. 새로운 세상은 혼돈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조화를 이룩하는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나타난다. 하느님 말씀에 복종할 때 세상의 모든 요소들은 제자리를 찾아 간다. 거기서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여자와 남자의 사명은 "창조된 것의 질서를 보존하고, 조화를 유지하고, 조화 속에서 모든 존재들이 번성하고, 생명이 꽃을 피우고 발전·진화하도록 하는 것"(Tea Frigueiro, "환경에 관한 성서적 성찰 시론", 45쪽)이다.

그런데 보프에 따르면 역사상 지배적인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 제도적 이유 때문에 구원의 신비에 더 큰 관심을 쏟았고 이 창조의 신비를 깊이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배적인 기독교 신학과 달리 항상 창조와 구원을 연결지을려고 노력이 있었고 이 노력은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보아벤투라(Boaventura), 스코투스(Duns Scotus), 오캄(Guilherme de Ockham), 지상적 현실을 다룬 현대 신학(세계신학, 정치신학, 해방신학), 그리고 희랍정교의 신학 등에 나타나고 있다({생태, 세계화와 영성, 48쪽).

이러한 전통에 서서 보프는 창조를 '신적 표현의 놀이', '하느님 사랑의 춤', '하느님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본다. 여기서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사신이고 그의 대표이며 성사이다. 따라서 "존재 사이에 계급적 질서도 없고 독점적인 하느님 대표도 없다. 모든 존재가 하느님 사랑 자체에서 나온다"(같은 책, 같은 쪽). 인간은 이 창조의 위에 군림하지 않고 창조의 안에 그리고 끝에 있다. 인간은 창조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세상은 인간에 앞서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은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 창조자인 하느님께 속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모상에 다라 창조된 인간은 이 창조에서 독특한 자리를 갖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동산으로서 주어진 세계를 가꾸고 돌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창조와 갖는 관계는 기본적으로 책임성의 문제이고 윤리의 관계이다"(같은 책, 같은 쪽). 그러나 보프에 따르면 이 책임성은 "세상에 대해 결정하거나 하지 않는 인간적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 이전의 것이고 피조물적 존재로서 인간 안에 새겨져 있다"(같은 책, 같은 쪽).

따라서 인간은 자신 안에 새겨진 신적 역동성에 따라 창조에 대해 활동하는 자이다. 다시 말해 "단지 세상을 실현할 때, 노동과 돌봄의 형태로 세상 안에 자리할 때만이 인간일 수 있고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여기에 파괴적이고 지배적인 어떤 요소도 없다. 오히려 심오한 생태학적 시각으로 볼 때 인간은 노동을 통해 진보하고 변혁할지라도 창조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운명지워졌음을 말한다"(같은 책, 49쪽).


6. 창조와 구원


보프는 이러한 창조신학적 관점에 설 때 구원신학의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고 본다. 구원은 창조와 인간 소명에서의 균열을 전제한다. 인간은 창조를 가꾸고 보존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피조물이 해방을 위해 신음하고 울부짖는다고 말한다(로마서 8,22). 여기서 구원은 이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창조의 복원이다. 구원은 "창조를 다시 취해 시간의 화살을 다시 설정하고 피흘리는 상처가 아물도록 하는 것이다"(같은 책, 같은 쪽).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서적 계시, 교회, 교도권, 성사는 상대적인 것으로 창조 복원이라는 더 큰 대의에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창조신학적 관점을 상실할 때 "성서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근본주의), 교회의 역할을 부풀리거나(교회중심주의), 아니면 성사의 기능을 과장한다(성사주의)"(같은 책, 같은 쪽).


7. 삼위일체론과 생태학적 하느님


생태학은 데카르트에서 뉴톤으로 이어지는 근대 기계론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모든 사물이 서로 관련되고 의존하면서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고 본다(F. 카프라, {변혁점}, 특히 9장 참조).

보프는 이러한 생태학적 시각에서 출발할 때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느님은 성부이고 성자이고 성령임을 고백한다. 이 삼위의 하느님은 영구히 공존하고, 서로 다른 신이나 동시에 한 하느님이며, 영원하고 무한하다. 이 삼위는 동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어떤 선재성, 종속성 또는 후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 세 명의 서로 다른 신이 있으나 이 세 신 사이에 삶의 연계가 있고, 사랑으로 서로 얽혀 교차하며, 셋이 하나로 통일되는 영원한 관계를 이룬다. 이 삼위의 하느님은 단 하나의 일치의 신이고 관계의 신이고 사랑의 신이다"({생태, 세계화와 영성}, 50쪽).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 또한 삼위의 하느님 사이의 이러한 관계와 일치해 전개된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하고 하나이고 서로 얽혀 있고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같은 쪽). 따라서 하느님은 모든 존재, 모든 관계, 모든 생태계에 내재한다.


8. 우주와 인간 안에 거하는 성령


생태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현대 물리학과 생물학의 기여에 따르면 우주는 영속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에너지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 에너지의 고도의 복잡한 형태가 생명 체계이다.

보프는 기독교 전통에도 이와 같은 현실 이해, 즉 에너지, 생명으로서의 현실 이해를 가능케 하는 범주가 있는데, 성령의 상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예언자들을 고무하고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을 열광케 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열정으로 채우는" 성령은 "우주를 충만케 하고 우주의 구조를 지속적으로 쇄신한다. 성령은 예수가 인간에 육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에 거주한다"({생태, 세계화와 영성}, 51쪽).

보프는 성령의 이러한 편재성(遍在性, omnipresenca)을 표현하기 위해 옛 시인을 인용한다. "성령은 돌에서 잠자고 꽃에서 꿈꾸며 동물들에서 잠을 깬다. 남자들 안에서 잠을 깨고 있음을 알고 여자들 안에서 잠을 깨고 있음을 느낀다". 보프는 '모든 곳에 편재하는 성령'(Spiritus ubique diffusus)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4세기와 5세기의 라틴 교부와 희랍 교부들, 특히 두 그레고리오(Gregorio Nazianzeno와 Gregorio de Nissa), 바실리오(Basilio)와 베드로 다미아노(Pedro Damiano), 그리고 에수의 우주적 현존을 말하는 샤르댕(Teilard de Chardin) 등에서 성령의 편재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볼 수 있다고 한다({같은 책, 51쪽).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은 우주를 자신의 신전, 활동과 현현의 장소로 삼는 성령을 이해할 때 우주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자발적 우주적 자연이나 역사 과정과 결부된 영성의 출현에 기여할 수 있으며, 생태학적 신비를 기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프는 본다.

떼아 프리제리오도 로마서를 인용해 피조물, 인간과 성령이 새로운 것을 잉태하면서 고통 속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읍니다. …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주십니다"(로마 8,22-26). 이 본문을 통해 볼 때 "사도 바오로는 인간의 새로운 삶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역동성은 우주 전체에 미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환경에 대한 성서적 성찰 시론", 41쪽).


9. 만유재신론: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있다


보프는 성령의 우주적 편재성에 대한 이해는 옛 기독교 전통의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panenteismo)의 복원을 가능케 하고 이 만유재신론은 생태 문제에 대한 풍부한 신학적 해석을 제공해준다고 주장한다. 이 만유재신론은 모든 것이 신성의 일부로 단 하나의 신의 서로 다른 모습이다는 범신론(panteismo)과 다르다. 만유재신론은 하느님과 피조물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동시에 서로 구별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즉 "모든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현존한다 … 하느님은 각각의 현실을 자신의 신전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 있다. 우리는 결코 하느님께로 가지 못하고 결코 하느님한테서 나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하느님 안에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 가기'(사도행전 17,28) 때문이다"({생태, 세계화와 영성}, 52쪽).

보프는 이러한 만유재신론에서 출발할 때 세상과 하느님이 하나로 어울러지는 새로운 영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우리는 최고의 애정으로 우주를 껴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삼위일체의 하느님 자체를 껴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체험에서 통합적이고 전체론적(holista)이고 하늘과 땅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영성이 태어난다"(같은 책, 같은 쪽). 그리고 이러한 영성은 "인간 영혼이 세상과 무관하게 하느님을 알 수 있다면 세상은 결코 창조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 서구 최대의 신비가인 에크하르트(Eckhart)의 통찰과도 일맥상통한다.


10.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역사적 기독교는 인간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 사고에 바탕해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지만 그에 반해 자연과의 통합을 모색한 긍정적 측면의 영성적 전통을 이어왔다. 보프는 생태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성인에서 자연과의 형제애를 실천적으로 산 모범적인 전형을 찾는다.

프란시스코 성인이 뛰어난 시적 감각으로 자연과의 친화력을 보여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인은 심오한 감정이입을 통해 "사물의 마음을 느끼고 그 존재론적 전언을 해독해내며"(같은 책, 53쪽) 인간과 자연이 성부의 안에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보편적 형제애를 노래했다. 그래서 성인은 "해와 달, 불과 물, 잡초, 심지어 병과 죽음까지 형제자매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불렀다"(같은 책, 같은 쪽). 프란시스코 성인은 이러한 우주적 형제애의 신비에서 출발해 모든 사물을 존중과 경의를 표했다. "나무를 자를 때에도 다시 싹을 틀 수 있도록 완전히 자르지 말도록 형제들에게 요청했다. 겨울에는 벌들이 배고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안쓰러워 벌들에게 꿀을 주기도 했다"(같은 책, 같은 쪽).

그러나 보프에 따른 프란시스코 성인의 독창성은 이러한 외적 생태학을 내적 생태학(정신생태학)과 연결해 '매혹적인 우주적 신비'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 있다. "그의 삶의 종반에 가장 높은 우주적 황홀경을 표현하는 '해 형제'에 대한 노래를 지었다. 이 노래를 지었을 때 그는 거의 장님이 되고 중병으로 시달렸다. 사실상 장님이 된 눈으로 해와 달, 바람과 물, 불과 땅 등 볼 수 없는 요소들을 노래한다. 이 요소들은 절대적 통합의 상징과 전형으로서 그의 내면에 있었다. 이 노래는 하늘과 땅, 모든 존재와 함께 하는 인간, 그리고 인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빛나는 태양과 같은 하느님을 연결하는 우주적 결합을 노래한 것이다"(같은 책, 53-54쪽).

보프에 따르면 프란시스코 성인의 또 다른 독창성은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중의 가난한 이들 - 나환자와 오늘날의 에이즈 환자 - 에 대한 선택, 그리고 그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산 선택과 피조물에 대한 온정을 하나로 엮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를 문둥병자와 구비오(Gubbio)의 늑대에게 이끈 바로 그 사랑으로 길거리의 가난한 이를 포옹하고 새들과 이야기한다. 그는 이 세상이 불평등의 왕국(Regio Dissimilitudinis)임을 아나 그렇다고 삶을 비통에 내맡기지는 않는다"(같은 책, 54쪽).


11. 몇가지 생태신학적 과제


지금까지 해방신학 안에서 전개되어 온 주요 생태신학적 논의를 주제별로 간략히 살펴 보았다. 해방신학자들은 올바른 생태 질서 추구가 기독교 신앙에 본질적인 것임을 명백히 한다. 특히 가난한 이들의 해방에서 출발하는 생태 문제 접근은 환경 문제를 사회 문제와 분리하는 '모호한 환경론적 논조'를 지양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제1세계의 보수적인 환경론자들은 자연보호 자체가 마치 선인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현실을 외면한다. 오늘날 생태계 위기는 종말론적 위기라는 점에서 위기에 대한 낭만적인 이해,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를 뒤에 감춘 모호한 논조가 갖는 독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경우에 따라선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류의 논의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방신학적 생태 문제 접근은 '환경 악화가 비참의 지속과 증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비참을 제거하고 나중에 생태 문제를 다룬다'는 식으로 생태 문제를 부차적 요인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해방신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아직 논의 초기 단계이므로 여러가지 측면에서 보완되거나 심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올바른 생태질서이고 이 생태질서에 대해 성서나 성전이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로 충분치 않다. 무엇보다도 왜 하느님이 보기에 좋았던 올바른 생태 질서가 파괴되었는가, 파괴로 이끈 주된 힘은 어떤 것인가, 생태질서를 복원하기 위해 기독교는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채워져야 한다. 니카라구아 '신학과 사회 연구소'(CIEETS)의 선언문은 국내 자본과 다국적 자본, '무차별하게 인간과 자연자 착취를 전개해 온 부당한 국제경제질서'를 자연 파괴를 주범으로 본다(Ingemar Hedström, {참새들이 되돌아 올까?}, 255쪽). 자본은 인간과 자연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몰록과 같다. 그런데 자본은 이렇게 자연을 파괴하고도 자기만이 올바른 생태 질서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장기적으로 사적 소유권이 환경의 가장 효과적인 보호자이다"(R.L.Stroup/J.S.Shaw). 이러한 역설은 자본의 물신성, 또는 우상성을 전제할 때만이 이해가 가능하다. 우상은 인간을 희생 제물로 원하면서 인간의 삶을 보장한다. 따라서 "대다수 세계 주민을 경제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무용한 존재로 배제하는 시장경제 논리 문제를 생태계 문제의 핵심에 놓아야 한다"({도전과 기만}, 53쪽). 즉 자본의 물신성을 벗기고 인간과 제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올바른 자리 매김을 할 때만이 하느님이 보기에 좋았던 참된 생태 질서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 인용 문헌


1. Sandro Gallazzi, "Ele nos livrou do Hades, nos salvou das garras da morte(Dn 3,88)", in Biblia e Ecologia, Estudos Biblicos 38, Ed. Vozes, Petropolis/Brasil, 1993.

2. Antonio Cruz & Airyon Otávio, "O profeta Elias e a seca - Uma questao ecologica", 같은 책.

3. Ana Maria Rizzante Gallazzi, "E Jave passeava pelo jardim(Gn 3,8)", 같은 책.

4. Tea Frigerio, "Esboco de uma reflexao biblica sobre meio ambiente", 같은 책.

5. Luis Mosconi, "… E todas as árvores baterao palmas(Is 55, 12)", 같은 책.

6. Irmas Capuchinhas, "Ecologia: Canto de louvor - grito de SOS", 같은 책.

7. Leonardo Boff, Ecologia, Mundializacao, Espiritualidade: A emergencia de um novo paradigma, Ed. Ática? Sao Paulo/Brasil, 1993.

8. J. B. Metz외, Concilium: nao há ceu sem terra(브라질판), n. 236, Ed. Vozes, Petropolis/Brasil, 1991/4.

9. Julio de Santa Ana, "Igrejas e meio ambiente", Tempo e Presenca, N. 261, CEDI, Rio de Janeiro/Brasil, jan-fev/1992.

10. Franz Hikelammert, Democracia y Totalitarismo, DEI, San Jose/Costa Rica, 1987.

11. Franz Hinkelammert, Las Armas Ideologicas de la Muerte, segunda edicion, DEI, San Jose/Costa Rica, 1981(제1판은 1977년에 출간).

12. Pedro Trigo, Criacao e Historia, Colecao Teologia da Libertacao, Ed. Vozes, Petropolis/Brasil? 1988.

13. Frei Betto & Leonardo Boff, Mistica e Espiritualidade, Ed. Rocco, Rio de Janeiro/Brasil, 1994.

14. Hugo Assman, Desafios e Falácias: ensaios sobre a conjuntura atual, Ed. Paulinas, Sao Paulo/Brasil, 1991.

15. Ingemar Hedström, Volveran las Golondrinas?: La Reintegracion de la creacion desde una Perspectiva Latinoamericana? segunda edicion, DEI, San Jose/Costa Rica, 1990.

16. Ingemar Hedström, Somos Parte de un Gran Equilibrio: La Crisis Ecologica en Centroamerica? 4ª edicionn, DEI, San Jose/Costa Rica, 1993(제1판은 1986년에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