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포터인가, 리포터인가”
미디어오늘 | 입력 2010.03.13 09:27
[동아일보 강제해직 35년 좌담] 장윤환·이부영·성유보·박종만 전 동아일보 기자
[미디어오늘 정리=김종화 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 1979년 7월9일 오후 2시, 서울형사지법 대법정.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소식지인 '동아투위소식'에 헌법과 긴급조치 9호를 비방하는 원고를 실었다는 죄목으로 세 명의 동아투위 위원이 재판정에 앉았다. 그들은 성유보 위원 등 3명으로, 앞서 '민권일지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장윤환 박종만 등 7명 위원의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78년 송년모임에서 소식지를 돌린 게 문제가 됐다. 검찰은 7월9일 공판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좁은 땅덩어리에 남북이 대치하며 4000만이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각각의 자유를 어떻게 다 보장할 수 있나. 우리가 전체의 의미에서 그나마 행복을 누리려면 서로 단결해야 한다.…삼국지에 '읍참마속'이라는 말이 있다. 명령을 어긴 마속을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다. 전체가 살기 위해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사랑하는 부하라도 버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세 사람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들이기는 하나 처벌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구형한다."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구형받은 성 위원은 다음과 같이 최후진술을 했다. "검사는 우리들을 삼국지의 마속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검찰이나 이 정권이 제갈량이란 뜻인가.…진나라의 진시황을 보라. 그 당시 '지록위마'라는 고사가 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다니 어디 그것이 사실인가. 이는 국민들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한 것이다.…전체의 행복이라 하는데 누구를 위한 행복인가. 전체는 민중인가, 정권인가?…언론자유는 그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 국민 스스로가 쟁취해야 한다."
장윤환(74), 박종만(67), 성유보(67), 그리고 동아투위 대변인으로 옥고를 치른 이부영(68) 위원까지 네 명의 전 동아일보 기자가 다시 모였다. 이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 36년, 동아일보 강제해직 35년이 되는 2010년에도 '자유언론'을 강조했다. 표현의 자유가 다시 억압받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은 현 상황이 개인의 자유보다 전체를 강조하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기에 퇴행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오는 17일 동아일보 강제해직 35년을 맞아 지난 6일 서울 목동 미디어오늘 회의실에서 진행된 이들의 좌담 전문이다.
"아직 당시 정신 포기한 사람 없어"
"35년전 비해 언론인의 자세 후퇴"
박종만
="최근 한 40대 변호사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동아일보는 3등 신문인데 박정희는 왜 하필 3등 신문을 상대로 싸웠나. 자유언론운동은 왜 또 3등 신문에서 나왔나.' 동아일보가 3등 신문이라니, 참….(웃음)"
이부영
="나는 60년대 말에 중앙일보를 좀 다니다가 동아일보에 갔는데, 중앙일보를 그만 둔 계기가 수습기자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오리엔테이션에 갔더니 하는 말이 '당신들은 기자이기 이전에 삼성맨이다'라고 하더라. 그 소릴 듣고 '아, 여긴 내가 있을 데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시험보고 동아일보에 갔다.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한일 수교협상이 끝난 다음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와 코리아나호텔을 지어 호텔 장사를 한 신문사다. 지금 이른바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신문 중에 사실은 동아일보가 언론자유 정신을 가장 많이 담고 있었던 신문이다. 그런데 거기 앞장선 기자들을 다 몰아냈는데 뭐가 남겠나."
성유보
="75년 해직 이후 김상만 당시 동아일보 사장과 양두언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 만나 나눈 얘기가 몇 개 있는데, '편집국의 중요인사는 협의해서 행사 한다' 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입증할 문서가 김영삼 정권 들어서 다 없어졌다고 하니…. 어쨌든 동아일보사가 광고탄압에 항복을 한 셈이다."
이부영
="60년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말의 왜곡'이 자행됐다. '학생데모'는 '학원사태'로, '물가인상'은 '물가재조정 혹은 현실화'로, '대학'은 '학원'으로, '임금동결'은 '임금안정'으로, '담화'는 '훈시'로 써야 했다. 또 '중앙정보부 혹은 보안사'는 '모 기관', '차입'은 '도입', '부정부패'는 '사회부조리', '예방(禮訪)'은 '접견', '허가'는 '양성화', '특정인에 대한 정부재산의 불하'는 '민영화', '세법개정'은 '세제개혁'이었다. 이들 용어는 전부 '당국의 협조요청'에 순응해 생산된 산물이었다."
성유보="당시 6개 정보기관이 있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국군정보사, 치안본부, 시경, 해당경찰서까지 6개다. 이들 정보원이 매일 편집국에 와서 편집국장과 각 부장한테 주문을 했다. 그러면 어떤 기사는 쓰레기통으로 가고, 어떤 건 내용이 바뀌고, 크게 써야 되는 기사가 1단짜리로 나가는 그런 시대였다. 정보기관이 언론이지 우리가 무슨 언론인이냐는 자조가 나왔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배운 입장에서 엄청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박종만
="그때 우리가 자조적으로 한 얘기가 '포터'(porter)였다. '리포터'(reporter)에서 're'를 뺀 것으로, 기자가 아닌 짐꾼이라는 말이다. 모든 기사가 관급기사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데도 그들은 불만이었다. 실제로 유신헌법 개정안이 나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준 보도자료를 단 한 자도 고치지 말고 보도하도록 했다. 그런데 거기서 뽑은 제목을 갖고도 시비를 걸어 편집기자를 서빙고동에 끌고 가서 고문했다. 내가 경찰기자를 할 때 하루는 청량리경찰서를 가서 기사거리 하나를 건졌다. 한 방위병이 변심한 애인 집에 가서 불을 질러 집이 좀 타다 말았던 사건이었다. 그걸 아침에 동아방송 기사로 쓰니, 타사 기자들도 줄줄이 그 기사를 받았다. 그날 저녁에 방첩대에서 날 잡으러 왔다. 회사에서 '일단 튀어라' 해서 피했는데, 그날 밤 중앙일보는 편집국장까지 잡혀갔다. 난 그 다음날 우리 데스크와 잡혀 들어갔고, 한 10여명이 거기 끌려갔다. 들어가니까 거기서 대뜸 '이 빨갱이 XX야' 하는 것이다. '너는 군과 민간을 이간질시켰다'는 것이다(웃음). 지금은 기사도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런 식이었는데, 지금 그걸 이해할 수 있겠나."
이부영
="KBS 외신기자를 하던 68년 1월 베트남에서 '구정공세'가 있었다. 사이공 시내가 발칵 뒤집힌 것을 받아썼더니 야단이 났다. 베트남사태가 위급한 걸 왜 그렇게 크게 보도 했냐, 왜 받아썼냐는 것이다. 신문사로 옮기고 나서는 연탄파동이 났다. 서울 사당동과 봉천동에 눈이 왔는데 산 아래보다 맨 꼭대기에선 연탄값을 세 배를 더 받았다. 지게로 전부다 지고 올라가야 하니 값을 더 쳐줘야 하긴 했다. 그런데 파동이 나니까 연탄공장에서 연탄을 내놓질 않았다. 값을 더 받으려던 것이다. 석탄공장을 갖고 있는 광산업자들은 아예 탄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자들은 '연탄 품귀현상이 일어나 달동네 서민들은 세배나 더 내고 쓴다'고 썼다. 그리고 끌려가서 죽도록 맞았다. 기자들이 민중봉기를 획책한다는 것이다."
박종만
="그런 사례를 말하자면 한이 없다. 73년도 가을에는 학생시위 보도해야 할 게 한 줄도 보도가 안 돼 회사에 항의하며 집에 자주 안 갔다. 이런 것들이 쌓여 74년 노조를 만들고 그해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운동선언을 한 것이다. 앞서 71년부터 73년까지 있었던 선언이 '수호'라는 소극적인 의미였다면, 네 번째는 '실천'이라는 적극적인 의미였다."
장윤환
="당시 유신헌법에서도 자유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유언론이라는 단어를 썼다. 프리 프레스(free press), 외국인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유신정권의 허점도 찌를 요량이었다. 그래서 정부도 처음에는 뭐라 말을 못했다."
성유보
="실천선언은 외부 간섭을 배제한다,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불법 연행시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는다 세 가지였다. 우리가 선언한 것을 지면에 싣지 못하면 실천이 아니기에 보도를 요구하며 농성했다. 석간 초판에는 못 나오고 밤12시 지역판 1면 3단으로 나왔다. 그 다음엔 전국적 시국기도회 등의 기사들을 데스크들이 한동안 전부 1단으로 내줬다. 회사에서는 크게 못 낸다 해서 우리는 또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이부영
="'1단 벽 깨기'였다."
성유보
="그런 기사들이 사회면 중간톱기사로 나가면서부터 '1단 벽'은 없어졌다. 그런데 이제 광고탄압이 시작됐다. 74년 12월말부터 광고가 계속 빠져나갔다. 이듬해 1월쯤 되니 동아일보, 동아방송, 잡지의 광고까지 모두 없어졌다. 그 때부터 백지광고를 냈더니, 격려광고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장윤환
="'너마저 배신하면 이민 간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 밥집 아줌마',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탄환임을 알라', '썩은 이를 뽑자 - 젊은 치과의사들', '시장길서 만난 우리들 빈 바구니로 돌아서며 조그마한 뜻 거목 동아에 보냅니다 - 주부일동', '이 상태에서 우리는 뭘 배울 수 있겠습니까 - 동성고 6' 등의 격려광고가 쇄도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선언운동 직후 실천특위를 만들어 각 부서마다 무슨 기사가 빠지는지, 무슨 기사 제목이 줄어드는지 점검했다. 매일 저녁 6시에 따로 정리를 해 각 부에서 일어난 일을 다 회람하도록 했다. 신문사 내부의 프락치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안에서 밖의 권력과 접촉하던 사람들은 이게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랬더니 어떤 간부는 술 마시고 들어와 '이게 무슨 빨갱이 세상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등 저항이 심했다. 밖에서도 국무총리나 공화당 의장이 '이제 동아는 홍위병이 접수했다. 무슨 조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언론에 얘기하고 그랬다. 그리고 나온 게 광고탄압이었다. 하지만 독자들이 격려광고로 그 지면을 메워 줬다. 민주주의의 만개였다."
박종만
="그러던 75년 초 회사 쪽이 권력에 굴복할 기미가 보여 새로운 게 필요하다고 준비하던 때 3월8일 18명이 느닷없이 해임됐다. '사내 집회나 무단유인물의 배포를 금지한다', '기구를 축소 폐지하거나 회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사원을 해임할 수 있다'는 조항이 인사규정에 신설된 데 따른 것이다. 가만 볼 수 없어 탄원하는 집회를 열었더니 또 무더기로 해임됐다. 그래서 3월12일 제작거부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5일 만인 3월17일 새벽, 회사 쪽이 동원한 폭도들이 23명의 단식기자 등 150여명의 동아일보 사원들을 거리로 쫓아냈다. 그리고 그해 7월, 광고탄압이 완전히 풀렸다."
성유보
="동아일보에서 저 정도로 잘리면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충격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해직된 지도 한 두 해지 지금은 벌써 35년이나 흘렀다. 이부영씨는 모르겠지만 난 감옥 갔다 와서는 빨갱이로 찍혀 취직도 안 되던데(웃음). 그래도 그 정신을 포기한 사람은 아직 단 한 명도 없다."
박종만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 언론자유의 최대치를 누리는 상황인데 언론인의 품성이나 자세는 오히려 후퇴했다는 생각까지 든다. 지금의 언론은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이 됐다. 사실을 왜곡한다는 게 아니라 사실을 선택적으로 써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부영
="결국 퍼스널 커뮤니케이션, '퍼스컴'(Personal+Communication)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퍼스컴 간의 네트워크다. 요즘 '위키트리'(wikitree)라는 데서 기사를 써봤는데, 그 곳은 모두가 기자면서 또 편집자다. 더 나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글을 계속 바꾸고, 손본다. 표현도 점잖아 질 수밖에 없고 기사도 점점 정확해진다. 이런 언론들을 많이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유보
="조선왕조 시절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리나 백성들에게 알리는 '조보'란 게 있었다. 그런데 선조 11년(1578년)에 민간인이 이 조보를 인쇄해서 뿌렸다고 고문 받고 유배 갔다. 중세는 아는 게 죄다. 백성들은 알면 안 된다. 반면 근대는 모르는 게 죄다. 그런 면에서 과연 지금이 근대고, 우리는 근대인이냐. 민주주의 아래 국민 모두가 주권자인데 어떤 주권자가 '너는 빨갱이야. 너 왜 그런 소리 해'라고 하는 것은 독재시대나 왕조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누구는 말 한마디 했다고 감옥 가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이부영
="그래서 난 이 정권과 조중동에 대해 야당이든 시민운동이든 결연한 자세를 가질 때가 왔다고 본다. 지난 대선은 상당한 정도로 합법성이 있는 선거였는데 한나라당이 530만 표를 앞섰고 총선에서도 개헌 선 직전까지 의석을 확보했다. 아무리 선거를 통해서 탄생했더라도 정권 스스로가 무의미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민주주의라는 의미가 없어진 것 아닌가."
성유보
="미국 독립선언서를 보면 이렇게 돼 있다.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해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다.' 정부를 만든 것도 구성원 스스로이기에 정부는 구성원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장윤환
="촛불학생들이 대한민국 헌법 1조를 외친다고 잡아가는 세상이니."
이부영
="난 너무 비관적으로만 볼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들 속에는 '잘해봐라,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언제든 뒤바꿀 수 있다'는 게 있다.
성유보
="나도 같은 생각이다. 옛날로는 못 돌아간다."
장윤환
="언론사 내부에서부터 노조 중심으로 모여 언론 본연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회사 말고 다른 데서도 글은 쓸 수 있잖나. 쫓겨나도 굶어 죽지 않는다. 걱정 말고 해봐라."
박종만
="우리가 자유언론실천선언 운동을 하게 된 것도 부끄러움에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진 것 같다. 성경에도 의인 10명만 있었다면 소돔성이 멸망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나. 각 언론사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의인이 그렇게 없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기자들이 좀 더 많이 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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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정리=김종화 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 1979년 7월9일 오후 2시, 서울형사지법 대법정.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소식지인 '동아투위소식'에 헌법과 긴급조치 9호를 비방하는 원고를 실었다는 죄목으로 세 명의 동아투위 위원이 재판정에 앉았다. 그들은 성유보 위원 등 3명으로, 앞서 '민권일지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장윤환 박종만 등 7명 위원의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78년 송년모임에서 소식지를 돌린 게 문제가 됐다. 검찰은 7월9일 공판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좁은 땅덩어리에 남북이 대치하며 4000만이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각각의 자유를 어떻게 다 보장할 수 있나. 우리가 전체의 의미에서 그나마 행복을 누리려면 서로 단결해야 한다.…삼국지에 '읍참마속'이라는 말이 있다. 명령을 어긴 마속을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다. 전체가 살기 위해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사랑하는 부하라도 버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세 사람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들이기는 하나 처벌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구형한다."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구형받은 성 위원은 다음과 같이 최후진술을 했다. "검사는 우리들을 삼국지의 마속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검찰이나 이 정권이 제갈량이란 뜻인가.…진나라의 진시황을 보라. 그 당시 '지록위마'라는 고사가 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다니 어디 그것이 사실인가. 이는 국민들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한 것이다.…전체의 행복이라 하는데 누구를 위한 행복인가. 전체는 민중인가, 정권인가?…언론자유는 그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 국민 스스로가 쟁취해야 한다."
장윤환(74), 박종만(67), 성유보(67), 그리고 동아투위 대변인으로 옥고를 치른 이부영(68) 위원까지 네 명의 전 동아일보 기자가 다시 모였다. 이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 36년, 동아일보 강제해직 35년이 되는 2010년에도 '자유언론'을 강조했다. 표현의 자유가 다시 억압받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은 현 상황이 개인의 자유보다 전체를 강조하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기에 퇴행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오는 17일 동아일보 강제해직 35년을 맞아 지난 6일 서울 목동 미디어오늘 회의실에서 진행된 이들의 좌담 전문이다.
"아직 당시 정신 포기한 사람 없어"
"35년전 비해 언론인의 자세 후퇴"
박종만
="최근 한 40대 변호사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동아일보는 3등 신문인데 박정희는 왜 하필 3등 신문을 상대로 싸웠나. 자유언론운동은 왜 또 3등 신문에서 나왔나.' 동아일보가 3등 신문이라니, 참….(웃음)"
이부영
="나는 60년대 말에 중앙일보를 좀 다니다가 동아일보에 갔는데, 중앙일보를 그만 둔 계기가 수습기자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오리엔테이션에 갔더니 하는 말이 '당신들은 기자이기 이전에 삼성맨이다'라고 하더라. 그 소릴 듣고 '아, 여긴 내가 있을 데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시험보고 동아일보에 갔다.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한일 수교협상이 끝난 다음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와 코리아나호텔을 지어 호텔 장사를 한 신문사다. 지금 이른바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신문 중에 사실은 동아일보가 언론자유 정신을 가장 많이 담고 있었던 신문이다. 그런데 거기 앞장선 기자들을 다 몰아냈는데 뭐가 남겠나."
성유보
="75년 해직 이후 김상만 당시 동아일보 사장과 양두언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 만나 나눈 얘기가 몇 개 있는데, '편집국의 중요인사는 협의해서 행사 한다' 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입증할 문서가 김영삼 정권 들어서 다 없어졌다고 하니…. 어쨌든 동아일보사가 광고탄압에 항복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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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말의 왜곡'이 자행됐다. '학생데모'는 '학원사태'로, '물가인상'은 '물가재조정 혹은 현실화'로, '대학'은 '학원'으로, '임금동결'은 '임금안정'으로, '담화'는 '훈시'로 써야 했다. 또 '중앙정보부 혹은 보안사'는 '모 기관', '차입'은 '도입', '부정부패'는 '사회부조리', '예방(禮訪)'은 '접견', '허가'는 '양성화', '특정인에 대한 정부재산의 불하'는 '민영화', '세법개정'은 '세제개혁'이었다. 이들 용어는 전부 '당국의 협조요청'에 순응해 생산된 산물이었다."
성유보="당시 6개 정보기관이 있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국군정보사, 치안본부, 시경, 해당경찰서까지 6개다. 이들 정보원이 매일 편집국에 와서 편집국장과 각 부장한테 주문을 했다. 그러면 어떤 기사는 쓰레기통으로 가고, 어떤 건 내용이 바뀌고, 크게 써야 되는 기사가 1단짜리로 나가는 그런 시대였다. 정보기관이 언론이지 우리가 무슨 언론인이냐는 자조가 나왔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배운 입장에서 엄청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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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만 전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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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박종만(67) 기자는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75년 3월 해직됐다. |
="그때 우리가 자조적으로 한 얘기가 '포터'(porter)였다. '리포터'(reporter)에서 're'를 뺀 것으로, 기자가 아닌 짐꾼이라는 말이다. 모든 기사가 관급기사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데도 그들은 불만이었다. 실제로 유신헌법 개정안이 나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준 보도자료를 단 한 자도 고치지 말고 보도하도록 했다. 그런데 거기서 뽑은 제목을 갖고도 시비를 걸어 편집기자를 서빙고동에 끌고 가서 고문했다. 내가 경찰기자를 할 때 하루는 청량리경찰서를 가서 기사거리 하나를 건졌다. 한 방위병이 변심한 애인 집에 가서 불을 질러 집이 좀 타다 말았던 사건이었다. 그걸 아침에 동아방송 기사로 쓰니, 타사 기자들도 줄줄이 그 기사를 받았다. 그날 저녁에 방첩대에서 날 잡으러 왔다. 회사에서 '일단 튀어라' 해서 피했는데, 그날 밤 중앙일보는 편집국장까지 잡혀갔다. 난 그 다음날 우리 데스크와 잡혀 들어갔고, 한 10여명이 거기 끌려갔다. 들어가니까 거기서 대뜸 '이 빨갱이 XX야' 하는 것이다. '너는 군과 민간을 이간질시켰다'는 것이다(웃음). 지금은 기사도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런 식이었는데, 지금 그걸 이해할 수 있겠나."
이부영
="KBS 외신기자를 하던 68년 1월 베트남에서 '구정공세'가 있었다. 사이공 시내가 발칵 뒤집힌 것을 받아썼더니 야단이 났다. 베트남사태가 위급한 걸 왜 그렇게 크게 보도 했냐, 왜 받아썼냐는 것이다. 신문사로 옮기고 나서는 연탄파동이 났다. 서울 사당동과 봉천동에 눈이 왔는데 산 아래보다 맨 꼭대기에선 연탄값을 세 배를 더 받았다. 지게로 전부다 지고 올라가야 하니 값을 더 쳐줘야 하긴 했다. 그런데 파동이 나니까 연탄공장에서 연탄을 내놓질 않았다. 값을 더 받으려던 것이다. 석탄공장을 갖고 있는 광산업자들은 아예 탄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자들은 '연탄 품귀현상이 일어나 달동네 서민들은 세배나 더 내고 쓴다'고 썼다. 그리고 끌려가서 죽도록 맞았다. 기자들이 민중봉기를 획책한다는 것이다."
박종만
="그런 사례를 말하자면 한이 없다. 73년도 가을에는 학생시위 보도해야 할 게 한 줄도 보도가 안 돼 회사에 항의하며 집에 자주 안 갔다. 이런 것들이 쌓여 74년 노조를 만들고 그해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운동선언을 한 것이다. 앞서 71년부터 73년까지 있었던 선언이 '수호'라는 소극적인 의미였다면, 네 번째는 '실천'이라는 적극적인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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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윤환 전 동아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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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환(74) 기자는 1965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74년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장으로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주도했다. |
="당시 유신헌법에서도 자유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유언론이라는 단어를 썼다. 프리 프레스(free press), 외국인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유신정권의 허점도 찌를 요량이었다. 그래서 정부도 처음에는 뭐라 말을 못했다."
성유보
="실천선언은 외부 간섭을 배제한다,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불법 연행시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는다 세 가지였다. 우리가 선언한 것을 지면에 싣지 못하면 실천이 아니기에 보도를 요구하며 농성했다. 석간 초판에는 못 나오고 밤12시 지역판 1면 3단으로 나왔다. 그 다음엔 전국적 시국기도회 등의 기사들을 데스크들이 한동안 전부 1단으로 내줬다. 회사에서는 크게 못 낸다 해서 우리는 또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이부영
="'1단 벽 깨기'였다."
성유보
="그런 기사들이 사회면 중간톱기사로 나가면서부터 '1단 벽'은 없어졌다. 그런데 이제 광고탄압이 시작됐다. 74년 12월말부터 광고가 계속 빠져나갔다. 이듬해 1월쯤 되니 동아일보, 동아방송, 잡지의 광고까지 모두 없어졌다. 그 때부터 백지광고를 냈더니, 격려광고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장윤환
="'너마저 배신하면 이민 간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 밥집 아줌마',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탄환임을 알라', '썩은 이를 뽑자 - 젊은 치과의사들', '시장길서 만난 우리들 빈 바구니로 돌아서며 조그마한 뜻 거목 동아에 보냅니다 - 주부일동', '이 상태에서 우리는 뭘 배울 수 있겠습니까 - 동성고 6' 등의 격려광고가 쇄도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선언운동 직후 실천특위를 만들어 각 부서마다 무슨 기사가 빠지는지, 무슨 기사 제목이 줄어드는지 점검했다. 매일 저녁 6시에 따로 정리를 해 각 부에서 일어난 일을 다 회람하도록 했다. 신문사 내부의 프락치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안에서 밖의 권력과 접촉하던 사람들은 이게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랬더니 어떤 간부는 술 마시고 들어와 '이게 무슨 빨갱이 세상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등 저항이 심했다. 밖에서도 국무총리나 공화당 의장이 '이제 동아는 홍위병이 접수했다. 무슨 조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언론에 얘기하고 그랬다. 그리고 나온 게 광고탄압이었다. 하지만 독자들이 격려광고로 그 지면을 메워 줬다. 민주주의의 만개였다."
박종만
="그러던 75년 초 회사 쪽이 권력에 굴복할 기미가 보여 새로운 게 필요하다고 준비하던 때 3월8일 18명이 느닷없이 해임됐다. '사내 집회나 무단유인물의 배포를 금지한다', '기구를 축소 폐지하거나 회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사원을 해임할 수 있다'는 조항이 인사규정에 신설된 데 따른 것이다. 가만 볼 수 없어 탄원하는 집회를 열었더니 또 무더기로 해임됐다. 그래서 3월12일 제작거부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5일 만인 3월17일 새벽, 회사 쪽이 동원한 폭도들이 23명의 단식기자 등 150여명의 동아일보 사원들을 거리로 쫓아냈다. 그리고 그해 7월, 광고탄압이 완전히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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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유보 전 동아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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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보(67) 기자는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동아일보노조 조직부장을 지내다 75년 해직됐다. |
="동아일보에서 저 정도로 잘리면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충격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해직된 지도 한 두 해지 지금은 벌써 35년이나 흘렀다. 이부영씨는 모르겠지만 난 감옥 갔다 와서는 빨갱이로 찍혀 취직도 안 되던데(웃음). 그래도 그 정신을 포기한 사람은 아직 단 한 명도 없다."
박종만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 언론자유의 최대치를 누리는 상황인데 언론인의 품성이나 자세는 오히려 후퇴했다는 생각까지 든다. 지금의 언론은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이 됐다. 사실을 왜곡한다는 게 아니라 사실을 선택적으로 써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부영
="결국 퍼스널 커뮤니케이션, '퍼스컴'(Personal+Communication)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퍼스컴 간의 네트워크다. 요즘 '위키트리'(wikitree)라는 데서 기사를 써봤는데, 그 곳은 모두가 기자면서 또 편집자다. 더 나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글을 계속 바꾸고, 손본다. 표현도 점잖아 질 수밖에 없고 기사도 점점 정확해진다. 이런 언론들을 많이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유보
="조선왕조 시절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리나 백성들에게 알리는 '조보'란 게 있었다. 그런데 선조 11년(1578년)에 민간인이 이 조보를 인쇄해서 뿌렸다고 고문 받고 유배 갔다. 중세는 아는 게 죄다. 백성들은 알면 안 된다. 반면 근대는 모르는 게 죄다. 그런 면에서 과연 지금이 근대고, 우리는 근대인이냐. 민주주의 아래 국민 모두가 주권자인데 어떤 주권자가 '너는 빨갱이야. 너 왜 그런 소리 해'라고 하는 것은 독재시대나 왕조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누구는 말 한마디 했다고 감옥 가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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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부영 전 동아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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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68) 기자는 중앙일보와 KBS를 거쳐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75년 해직된 그는 동아투위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
="그래서 난 이 정권과 조중동에 대해 야당이든 시민운동이든 결연한 자세를 가질 때가 왔다고 본다. 지난 대선은 상당한 정도로 합법성이 있는 선거였는데 한나라당이 530만 표를 앞섰고 총선에서도 개헌 선 직전까지 의석을 확보했다. 아무리 선거를 통해서 탄생했더라도 정권 스스로가 무의미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민주주의라는 의미가 없어진 것 아닌가."
성유보
="미국 독립선언서를 보면 이렇게 돼 있다.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해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다.' 정부를 만든 것도 구성원 스스로이기에 정부는 구성원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장윤환
="촛불학생들이 대한민국 헌법 1조를 외친다고 잡아가는 세상이니."
이부영
="난 너무 비관적으로만 볼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들 속에는 '잘해봐라,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언제든 뒤바꿀 수 있다'는 게 있다.
성유보
="나도 같은 생각이다. 옛날로는 못 돌아간다."
장윤환
="언론사 내부에서부터 노조 중심으로 모여 언론 본연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회사 말고 다른 데서도 글은 쓸 수 있잖나. 쫓겨나도 굶어 죽지 않는다. 걱정 말고 해봐라."
박종만
="우리가 자유언론실천선언 운동을 하게 된 것도 부끄러움에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진 것 같다. 성경에도 의인 10명만 있었다면 소돔성이 멸망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나. 각 언론사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의인이 그렇게 없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기자들이 좀 더 많이 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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