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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16일 Facebook 이야기

pudalz 2013. 12. 1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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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어디가 보다가... 문득 우리는 왜 저 뉴질랜드처럼 평온한 삶을 살수 없을까? --; 생각됨. 저주 받은 지정학적 위치에 뿌려진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소멸되어가는 인생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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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라고 페북이 묻는다.  
    나는 지금 이성규감독님 생각을 하고 있다.  
    요 며칠 새벽이면 잠이 깬다.  
    나는 감독님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실 줄 몰랐다.  
    감독님이 얼마 전에 "열흘인지 알았는데 한 달이다"라며  
    기뻐하는 글을 올렸으니까, 나는 그렇게 빨리 떠나실 줄은 몰랐다.  
     
    생전에 통성명을 한 적도 없었고  
    심지어 전주영화제 피칭 때에는  
    <4대강> 작업으로 피칭한 내게  
    자꾸 <어머니> 좋아요~ 라고 하셔서  
    삐져 있었으니까.  
     
    그래도 페북 덕분에 감독님 글을 자주 볼 수 있었고  
    그래서 감독님에 대해서 까칠한 마음을 다 접을 수 있었는데.  
    사실 <시바, 인생을 던져>에 대한 소개글을 잡지에 쓰기도 했는데  
    감독님한테 썼다는 말도 안했다.  
    못써서 부끄럽기도 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아는 척 한다고 의아해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감독님은 많은 글들을 남기셨지만  
    주로 공감했던 글들은 독립피디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방송국 안에서의 성골, 진골.....이런 이야기  
    짧은 알바기간이었지만 충분히 느꼈으니까.  
    이 사진을 볼 때면 눈물이 난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이 사진을 봤다. 이 글도.  
     
    이 사진은 나에게 사무친다.  
    99년 여름부터 3개월간 MBC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나는 내 위치가 뭐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남아, 우리가 그 때 뭐였지?  
    계약직은 아니었지?  
    파우처직원이라고 부르던데 그게 뭐였지?  
     
    국민의 정부라고 하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해서  
    방송국들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류의 프로그램들이 생겨났다.  
    방송국에서 '독립다큐 경험있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했고  
    나는 정남이와 함께 mbc에서 일을 했다.  
    네개 팀이 있었고 나랑 정남이는 그 중 두 팀에,  
    다른 한 팀에는 계약직 AD형이, 그리고 한 팀에는 정직원 AD가 있었다.  
     
    방송국 일은 쉽지 않았다.  
    원래 두 개를 만들기로 약속을 하고 갔었지만  
    나는 한 개만 하고 돌아왔다.  
    두번째 프로그램이 '박동선' 관련 프로그램이라서  
    미국 간다고 여권까지 만들어놓고 나는 그냥 한 개만 하고 돌아왔다.  
    무책임하다고 욕 먹을 일은 없었다.  
    계약직 AD형이 눈깜짝할 새에 빈 자리를 메웠으니까.  
     
    매주 금요일이 되면 카메라팀과 편집실 배정을 받아야했고  
    편집실은 늘 모자라서 빨리 가지않으면 배정을 못 받았다.  
    배정을 못 받으면 메뚜기를 뛰어야했고  
    메뚜기라도 못 뛰어서 제 때 편집을 못해내면 욕먹었기 때문에  
    편집실 배정받으려고 늘 발을 동동 굴렀던 것같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몇개의 삽화가 있다.  
    시간에 쫓기며 편집을 하다가 잠시 화장실엘 다녀왔는데  
    모르는 여자가 내가 배정받은 방에 앉아서 편집을 하고 있었다.  
    나도 방을 배정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렇게 메뚜기를 뛰기 때문에  
    늘 있는 일이기에 나는 그 분한테  
    "저 여기 제가 배정받은 방인데요"라고 하니  
    그 여자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런데요?" 하고서는  
    고개를 돌리고는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그 여자가 왜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나는 곧 알아차렸다.  
    그 여자는 정직원이었던 거고  
    나는 신분증 하나 없는 알바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옆에 오래도록 서있는 나를 무시한 채  
    계속 편집을 했고  
    나는 "얼마를 더 쓰셔야하는지 알려주세요"라고 말했지만  
    그 여자는 내 말을 싹 무시한 채 계속 자기 하던 일을 했다.  
    나는 몇십분 동안을 더 서있다가  
    정직원인 우리 피디한테 가서 사정을 말했다.  
    우리 피디는 어쩔 수 없으니 그냥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 피디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지금도 MBC피디로 일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정직원으로.  
     
    방송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정직원들이 왜 그토록  
    예의가 없는지 잘 알게 되었다.  
    작가를 포함한 비정규직들의 일자리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한 프로그램이 끝나고 다음 프로그램에 써주지 않으면  
    짐을 싸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휴먼다큐 사랑도 만들고  
    가끔씩 휴머니스트인 척 인터뷰도 하면서 잘 지내는 것같다.  
    하지만 삶의 어느 부분에서라도  
    차별을 유포하고 차별에 편승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큐멘터리스트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을 듯.  
     
    방송국에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학동기를 봤다.  
    나는 정말 아무 생각없이 반가워했는데  
    그 애는 정직원으로서의 권위가 잔뜩 담긴 목소리로  
    "그래, 너 일한다는 소식 들었다.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라고 했다.  
    밥을 먹자고 해도 같이 밥을 먹었을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밥을 먹자고 하는 일은 없었고  
    그 뒤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 애가 내 반가움에 화답하는 태도는  
    뭐랄까....  
    나 자신을 '친분을 이용해서 들러붙으려 하는 파우처나부랭이'로  
    느끼게 했으니까.  
     
    내가 맡았던 건 조봉암 사건이었다.  
    관련 영상이 많이 없어서  
    리버티뉴스를 다 외울 정도로 많이 보았고  
    그러다가 몇 년 전 '대한민국 지도자' 특집 프로그램에  
    조봉암 사건 관련 검사가 나오는 걸 봤다.  
    내가 프로그램을 할 때 그 검사는 이미 고인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경험있는 사람들은 안다.  
    완성프로그램에서 1분의 인터뷰가 있다면  
    최소한 그 열배에 해당하는 촬영본이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기뻐서 자료목록을 뒤져봤다.  
    촬영본이 자료실에 이관되지 않은 것같다.  
    그럼 어디에 있을까?  
     
    수소문을 해서 당시 조연출을 만났다.  
    그는 정직원이었다.  
    아주 귀찮아하며 내 설명을 듣던 그는  
    "그 때 그 촬영본 어디 있어요?" 하는 물음에  
    "재활용했지!" 하며 빤히 쳐다봤다.  
    맥이 빠져 대답할 말을 못 찾는 내게  
    "왜? 문제있어?" 하던 그 사람.  
    역시나 휴먼다큐 피디로 최근까지 이름이 나오길래  
    멍청이가 참 오래도 버티는군, 하고 혼잣말.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건 파업 이었다.  
    파업을 했고 정직원들이 광장에서 집회를 하는동안  
    나는 계약직 카메라맨과 함께 촬영을 나가야했다.  
    나는 그래서 이성규감독의 이 사진이 눈물겹다.  
    글에 절절히 나와있듯이  
    당신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방송국 안에서 작가들의, 계약직 pd들의 뼛골을 뽑아가며  
    방송국 밖 독립피디들의 피를 빨아가며  
    영광과 안락을 다 차지해가며  
    방송국 정직원들은 살아간다.  
    그런데도 이성규 감독님 당신은 언론민주화를 위한 대의 때문에  
    그들 편에 섰다.  
     
    내가 결국 그만 뒀던 건  
    나의 무능 때문이었을거다.  
    나는 매일 밤을 새웠다.  
    피디는 지침을 주지 않았고  
    메인작가는 늘 피디 대신 내게 화를 냈다.  
    그게 방송국의 시스템이라 했다.  
    메인작가는 피디에게 말을 못하고  
    에이디에게 말을 하는 방식으로 소통이 이뤄진다는 거였다.  
     
    작가가 가닥을 못 잡아서 일은 늘 산더미였다.  
    컴퓨터 그래픽은 확정된 문서로 만들어야하는데  
    작가는 여전히 오케이본을 확정하지 못해서  
    수십 페이지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놓으라고 했다.  
    그건 자신의 게으름, 혹은 무능을 pd, 혹은 ad에게 넘기는 일.  
    하지만 하라면 해야 했고  
    그래서 헬리실이라고 부르는 데에 가서  
    "왜 이렇게 양이 많냐?"는 구박을 받으면서  
    몇날 몇일을 사정하며 만들어야했다.  
    정작 최종본에 실릴 건 3~4개밖에 아닌데  
    나는 몇십개의 씨지를 만들어야했다  
    그렇게 해야 했다.  
     
    피디는 늘 일찍 집에 갔다.  
    집에 가면서 내일까지 이거이거 해놓으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밤을 새서 일을 한다.  
    저 피디는 너무 에이디를 고생시킨다는 소문이 돌자  
    피디가 말했다.  
    "새벽에라도 잠깐 집에 들어갔다가 아침에 출근하는 꼴을 보여.  
    안 그러면 내가 욕을 먹으니까"  
     
    내가 방송국을 그만 두겠다는 결심을 말하자  
    처음 우리를 데려갔던 피디가 말했다.  
    "어디든 배울 게 있잖니. 조금만 더 참아"  
     
    나는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있어야만 하는 군대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내 아까운 젊음과 내 노력을 더 가치있는 일에 쓰고 싶어요.  
     
    푸른영상에 돌아와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우리 선배들이 좀더 편안하게 일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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