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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朝·東 저격수’ 신강균-월간중앙& MBC가이드

pudalz 2008. 9. 22. 02:02

*쓰레기 같은 제목과 부제지만 신강균씨의 동정이 궁금해서 뒤지다가 ... 시사매거진 2580 취재데스크 부장으로 계시네요.

믿기 힘들지만 이런 분이 구찌백사건의 단초를 제공하시고 후배기자에게 삼성로비스트라는 비난을 받고 계시니 무엇이 사실인지 정말 궁금하고 그런 폭로가 절대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강균씨가 취재하고 참여한 그 훌륭한 보도와 프로그램들도

다 사후처리가 필요한 상업용이미지였을까 정말 궁금하네요.

 

 

인물탐험] ‘朝·東 저격수’ 신강균

언론개혁의 使徒인가, 권력의 전위대인가?
박종주 월간중앙 차장(jjpark@joongang.co.kr)  

극단의 평가 속에 화제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멜빵기자’ 신강균의 사실은…

한국의 신문들은 오랜 세월 방송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신문은 TV 뉴스의 공정성에서부터 아침 드라마의 불륜 문제에 이르기까지 방송의 거의 모든 영역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이에 대한 방송의 반론이나 반격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2001년 들어 이러한 분위기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2001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느닷없이 ‘언론개혁’을 언급한 후 방송사들이 매체 비평 프로그램을 신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모습을 나타낸 것이 2001년 4월 첫 전파를 탄 MBC의 ‘미디어 비평’이었다. ‘미디어 비평’은 손석희·성경환 아나운서가 진행하다 2003년 보도제작국 소속 신강균(46) 기자를 앵커로 영입했다. 이 프로그램은 2003년 11월 프로그램 이름을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이하 뉴스서비스)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뉴스서비스’는 ‘미디어 비평’ 시절부터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신문에 대한 비판적 보도를 잇따라 내보내면서 언론개혁을 주장하는 단체와 네티즌들을 우군(友軍)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공격의 대상이 된 일부 신문사와는 프로그램 시작 직후부터 긴장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신문 때리기에 나선 대표적 방송 프로그램’으로 지목되는 ‘뉴스서비스’의 간판은 앵커를 맡은 신강균 기자다. ‘시사매거진 2580’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낯익은 그는 ‘미디어 비평’이 저조한 시청률로 고전할 때 등판한 구원투수였다. 그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단호한 어투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신강균 마니아’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성격이나 진행 방식과 관련해서는 ‘조선·동아 죽이기를 통한 노골적 여당 편들기’ 등의 문제제기도 끊이지 않고 있다. ‘논란 속의 앵커’ 신강균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지난 7월 초 인터뷰 요청을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우리 프로그램에서 요즈음은 ‘중앙일보’ 얘기 별로 안 하는데, 무슨 취재를 하려고 그러시냐”고 궁금해 했다. 그러면서 “담당 부장과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으니 인터뷰 요지를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튿날 바로 인터뷰 요지를 이메일로 보냈고, 3일 뒤 인터뷰 약속이 잡혔다. 서울 여의도의 iMBC 빌딩 15층에 있는 사무실로 찾아가 그를 만난 것은 7월13일 오후였다.

인터뷰는 편집기 몇 대가 놓여 있는 사무실 바로 옆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그는 기자가 녹음기를 꺼내자 “지금부터의 진술은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고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며 웃었다. “유명세에 비하면 알려진 이력이 거의 없더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신상에 해당하는 사항부터 얘기를 풀어나갔다.

대학원 졸업 후 ‘동아일보’에도 응시

신강균 앵커의 고향은 전북 정읍. 태어난 해는 1959년이다. 제법 규모가 큰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부모는 “공부 잘해서 출세해야 한다”며 외동아들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찌감치 서울로 올려보냈다. 덕분에 그는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부모와 떨어져 서울 친척집에서 보냈다. 경동고등학교 시절 신문반 활동을 했던 그는 1977년 건국대 법대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고려대로 옮겨 형법을 전공하며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원 졸업 후 한때 독일 유학을 검토하던 그는 평생 공부를 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지 고민한 끝에 유학의 꿈을 접는다. 유학 포기 후 그가 점찍은 직업이 바로 기자였던 것이다.

―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배경은?
“고등학교 때 신문반 활동을 한 것도 계기가 됐겠죠. 제가 원래 역마살이 좀 있거든요. 역마살에 맞는 직업을 택하다 보니 기자가 된 거죠.”(웃음)

― 유학을 포기하고 기자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기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썩 내켜 하지 않으셨죠.”

― 부모님이 그런 인식을 가진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공장을 운영하면서 돈을 뜯기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상이군경·소방공무원 등이 주로 찾아와 손을 벌렸는데, 지방지 기자들도 자주 찾아왔던 모양입니다. 당시만 해도 그런 기자들이 꽤 있었거든요. 부모님이 기자들을 좋게 볼 수 없었겠지요.”

― 바로 MBC에 합격했습니까.
“1986년 5월 KBS 공채에 응시했다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공영방송에서는 전라도 사람을 안 받아주나 보다’라며 위로하시더군요. 그 다음에 원서를 낸 데가 MBC와 ‘동아일보’였습니다. 두 곳 모두 필기시험을 통과했죠.”

― 그렇다면 동아일보는 안 간 겁니까, 못 간 겁니까.
“면접시험 날짜가 겹치는 바람에 택일해야 했죠. 어느 면접장으로 갈까 고민하다 필기시험 성적이 더 좋게 나왔을 것 같은 MBC를 택한 겁니다. 날짜 때문에 한쪽을 선택해야 했으니, 동아일보에는 안 간 것이기도 하고 못 간 것이기도 하네요.”

― 입사 후 처음 배치받은 부서는?
“스포츠 취재부였습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기자들이 대거 스포츠 취재부로 징발될 때였는데, 서울올림픽에서 사격 취재를 담당한 뒤 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사회부로 옮겨 서울 강남·마포경찰서를 출입했죠.”

― 이력서에 보면 그 무렵 ‘카메라 출동’을 담당한 것으로 돼 있는데, 사회부로 간 지 얼마 안 돼 부서를 또 옮긴 건가요?
“방송 뉴스는 80초에서 90초짜리가 대부분입니다.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90초 뉴스’의 한계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뉴스로 어떻게 심층보도를 할 수 있느냐는 얘기를 동료들과 술자리에서 자주 했죠. 이게 간부들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회사 사정으로 몇 년 동안 중단됐던 ‘카메라 출동’이 부활할 때 ‘해볼 생각이 있느냐’는 제의가 오더라고요. 두말하지 않고 ‘OK’를 했죠.”

‘기동취재부’ 소속으로 4년 동안 ‘카메라 출동’을 담당한 그는 1994년 2월 ‘시사매거진 2580’이 출범할 때 창설 멤버로 참여하게 된다. ‘2580’ 첫 방송 때 첫번째 꼭지를 진행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프로그램이 자신의 적성과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한 그는 ‘붙박이’를 자원했다. 미국으로 1년짜리 연수를 다녀온 기간을 빼고도 8년 동안이나 ‘2580’을 진행했다.

그의 부모는 기자라면 당연히 정치부 기자를 떠올리고, 쟁쟁한 사람들 만나는 모습이 ‘뉴스데스크’에 나와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덕분에 ‘카메라 출동’으로 자리를 옮길 때 그곳이 무엇을 하는 부서인지 부모에게 설명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던 그에게 마침내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할 기회가 찾아왔다. 1998년 정치부로 옮긴 것이다. 이때의 부서 이동은 ‘2580’에 제대로 뿌리내리려면 정치권 내부와 정치부 기자들의 취재 구조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원한 것이었다고 한다.

‘시사매거진 2580’ 8년간 제작

1년 후 ‘2580’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약속을 받고 정치부로 자리를 옮긴 그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으로 여당이 된 민주당을 출입처로 배정받았다. 조금은 색다른 동기에서 정치부를 택했던 까닭에 그의 취재는 여느 기자와는 다른 데가 있었다. 그의 얘기다.

“당시는 권노갑 씨가 최고의 실세로 주목받을 때였습니다. 어느날 평창동 권노갑 씨 집으로 기자들이 취재를 간다기에 카메라 기자와 함께 찾아갔죠. 그랬더니 미리 와 있던 기자들이 ‘카메라 취재한다고 얘기했느냐’고 묻는 겁니다. 방송기자는 반드시 카메라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던 저로서는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정치부 기자들은 카메라 기자와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겁니다. 정치인들도 카메라 앞에서는 얘기를 잘 안 하려고 하고요. 취재 관행이 이렇다 보니 정치인을 카메라 취재하려면 미리 양해를 구하는 ‘의전’ 비슷한 것이 생긴 겁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나 혼자만이라도 그 분위기를 깨야겠다고 나섰죠. 현장에 카메라 기자와 함께 나타나 ‘카메라 켜’라는 얘기부터 했습니다. 덕분에 한동안 제 별명이 ‘카메라 켜’였어요.”

― 카메라 취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정치인이 드물었던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정치인이 그랬어요. 기자들을 만나 자주 뭔가를 폭로했던 정형근 의원도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면 말을 안 합니다. 코멘트 따려고 쫓아가면 화장실까지 도망가고는 했죠. MBC 앵커 출신인 정동영 의원도 카메라 싫어하기는 정형근 의원이나 다를 게 없더라고요.”

― ‘붙박이’를 자처했던 ‘2580’을 떠나 ‘미디어 비평’으로 간 이유는 뭡니까.

“꼬박 8년째 ‘2580’을 진행하다 보니 뭔가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이 유사 프로그램도 많이 생겼기 때문에 차별화를 시도할 때가 됐다는 것이었죠. 중견 기자 6명 정도로 팀을 짜 한 기자가 2주에 한 번씩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하자는 게 저의 구상이었습니다. 특정 기자가 시청자들과 자주 만남으로써 기자의 보이스 컬러나 억양, 문장 구조 등에 익숙한 고정 팬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겁니다.

주간지나 월간지 같은 포맷으로 ‘2580’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의 ‘2580-2’를 만들자는 게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기자들과 구체적 안까지 짜 간부들과 상의했는데, 비슷한 성격의 교양 제작 프로그램과의 관계도 있고 해서 편성에 반영이 안 됐습니다. 생각했던 게 이뤄지지 않아 허탈해 있을 때 ‘미디어 비평’ 앵커를 맡아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자리를 옮긴 것이죠.”

‘카메라 출동’과 ‘2580’을 오래 진행한 덕분에 그에게는 ‘심층’이라는 이미지와 ‘고발’이라는 이미지가 함께 따라다닌다. 그가 생각하는 ‘고발’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는 고발의 다른 한쪽에는 ‘애정’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비리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피해자가 있게 마련인데, 이들 피해자에 대한 애정이나 연민이 없으면 결코 비리를 제대로 파헤칠 수 없다는 지론이다. 이러한 경험에서 얻은 그의 결론이 바로 “심층취재와 비리 고발에 능한 기자는 휴먼 스토리에도 능하다”는 것이다.

찬사와 비난 동시에 받는 ‘멜빵 앵커’

그는 이런 얘기를 할 때면 외모나 키가 절대적 기준이 되는 대기업 여사원 채용시험의 허구성을 파헤친 ‘Too short to work’를 빼놓지 않는다. 전교 1, 2, 3등인 서울 염광여상 졸업반 학생들의 대기업 응시와 낙방 과정을 담았던 이 프로그램을 그는 ‘여상 졸업반 학생들의 눈물을 따라갔던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그는 ‘카메라 출동’과 ‘2580’을 진행하면서 한국기자상·한국방송대상 등 여러 차례 큰 상도 받았다. 스타성을 인정받아 선후배들로부터 뉴스 앵커로도 여러 번 추천됐다. 그랬던 터여서 그에게 ‘미디어 비평’은 또 다른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미묘한 시기’에 논란이 일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데 대한 대가라면 대가였다. 그는 시청자들의 반응부터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상황에 서 있다. MBC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 있는 두 편을 읽어 보자.

멜빵의 신사 ‘신강균’ 기자님!
기자님의 씩씩하고 믿음직한 코멘트는 우리 국민의 희망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계속 매진해 주십시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수구 골통들의 더러운 몸 구석구석을 헤집어 그들 몸에 서식하는 온갖 잡균을 다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신기자님 화이팅! (ID:MEM420, 2004년 4월13일)

방송에서 방송만 잘났다네…
저런 방송이 제살깎기라는 거 왜 모르나…. 언론개혁이 방송 쪽으로 가니까 무섭냐? 물타기라니…. 신문사랑 가장 적대적인 여당 방송이 MBC라는 거 누구나 다 안다…. 여당 등에 업고 신문들 뭉개보려고 애쓰네…. 우리당에서 시키데? 이 프로 왜 안 없어지는지 모르겠다…. 웃음만 나네…. 내가 이래서 MBC 뉴스는 안 본다…. 중립을 좀 지키시지….(ID:REOARD, 2004년 6월19일)

이처럼 엇갈리는 평가 속에 매체 비평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소신’과 ‘고민’을 함께 털어놓았다.

― ‘뉴스서비스’의 아이템 선정의 기준은?
“쉽게 얘기하면 국민의 신뢰에 편승해 언론이 사기 치는 것들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세상에 그런 일이 있어’라고 했는데,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우선적으로 아이템이 됩니다. 언론이 독자나 시청자를 속이는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게 아이템 선정의 최우선 기준입니다.”

― 회의는 자주 하나요?
“녹화 다음날인 금요일 오후에 다음주 아이템회의를 합니다. 월요일 오전 평가위원들과의 회의에서 그 전주 방송 내용을 검토하고 그 주에 예정된 아이템에 대한 자문을 구하죠. 목요일 오후에는 녹화를 앞두고 전 팀원이 모여 코멘트 확정을 위한 강독회를 갖습니다. 1주일에 3, 4시간짜리 회의를 세 번 정도 하는 셈이죠.”

― 아이템 선정시 앵커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방송 프로그램의 힘은 팀워크에서 나옵니다. 아이템 선정과 관련해서는 ‘공감’이 최우선 기준이 됩니다. 데스크라고 해서 공감이 안 되는 아이템을 주장할 수도 없고, 앵커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을 반대할 자격이나 재량권이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충분한 토론을 거쳐 공감대가 형성된 내용들이 전파를 탄다고 보면 됩니다.”

“조선·동아일보, 참 잘 만들죠”

― ‘뉴스서비스’의 전신인 ‘미디어 비평’은 2001년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가 본격 시작될 무렵 출범해 이른바 ‘메이저신문’ 비판에 주력했습니다. 실제 세무조사 때 집중 타깃이 된 것도 이들 신문 아니었습니까.

“ ‘미디어 비평’을 만든 분이 김중배 사장이었습니다. 동아일보에서 오래 기자생활을 했던 분이 오죽하면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점도 있다고 봅니다…. 흔히 방송을 포함한 언론은 비즈니스와 무관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청률이나 판매부수를 의식하며 광고수입에도 신경 쓴다는 점에서 언론도 비즈니스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언론이 일반 기업체를 비판하듯 언론도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청자나 독자에게 잘 팔리는, 단맛 나는 제품을 만드느라 ‘사카린’을 너무 많이 쳤거나 색깔을 내기 위해 유해색소를 넣었다면 비판해야죠. ‘미디어 비평’은 그런 취지에서 시작된 겁니다.”

― 여러 신문이 있는데 유독 정부 여당과 불편한 관계인 신문들만 공격하는 이유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인데, 두 신문은 제가 봐도 참 잘 만듭니다. 기획이나 지면 배치, 제목 뽑기 등이 아주 탁월해요. 같은 반찬을 갖고도 다른 신문에 비해 손님이 먹을 만한 상품으로 만드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평범한 소재를 매번 그런 식으로 만들다 보면 반드시 도를 넘게 돼 있습니다. 기사가 잘못 나오든지 제목이 잘못 뽑히든지 하게 마련이죠. 두 신문이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 ‘팩트’가 잘못된 오보, 기사와 전혀 다른 제목이 붙는 경우는 당연히 비평의 대상이 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설이나 칼럼을 문제삼는 것은 매체 비평의 본령에서 벗어난 것 아닙니까.  

“노무현이 잘하느냐 아니냐, 박근혜가 옳으냐 아니냐를 쓴 사설은 우리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시(社是)가 녹아 있는, 그야말로 사설이거나 ‘오피니언’이기 때문이죠. 문제는 대부분의 사설이 스트레이트 기사를 근거로 작성되는데, 원재료 격인 스트레이트 기사가 잘못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일 때 한 신문에 ‘거창 샛별중학교 선생님들도 NEIS 채택’이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확인취재해 보니 상당히 왜곡된 보도였습니다. 이런 기사가 나가면 그 다음날 ‘전교조의 본산이라고 할 샛별중학교도 NEIS를 채택했다. 그럼에도 일부 전교조 교사들이 NEIS가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식의 사설이 나옵니다. ‘뉴스서비스’는 바로 그런 사설을 문제 삼을 뿐입니다.”

― 방송이 신문을 공격하려면 권력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스스로의 과거도 언급해야죠.
“반성한다고 사면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 프로그램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과거의 방송이 권력의 주구 노릇을 했다고 시인하고 반성했습니다.”

― 신문 비평에는 큰 비중을 두면서 방송은 거의 다루지 않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출입처에서 제공하는 기자들의 ‘공짜 여행’ 문제를 다룰 때 MBC도 무지하게 씹었습니다.”

― 신문을 공격하는 이면에는, 신문에 비해 위축된 채 지냈던 방송인들의 울분이 녹아 있다는 학자도 있던데요?
“그때의 설움과 열등감을 신문을 두들기면서 떨쳐버린다는 얘기 같은데, 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시절 현장을 뛰었던 기자들이 지금은 부장이나 부국장이 돼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분들은 회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장 자리 골고루 다 거치고 특파원도 한두 번씩 나갔던 경우입니다. 한마디로 ‘해피’한 분들이죠. 신문에 대한 열등감이나 울분에서 ‘이제는 복수하자’고 생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그분들은 대체로 신문과 각을 세우는 것을 부담스러워 해요. ‘이거 너무 센 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경우가 더 많거든요.”

‘뉴스서비스’를 둘러싼 논란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대통령 탄핵정국 때였다. 한국언론학회가 ‘탄핵 관련 TV 방송 내용 분석’ 보고서를 통해 ‘극단적 사례를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고 통계처리했을 정도로 편향이 심했다’고 지적한 프로그램이 바로 ‘뉴스서비스’였다. 이 프로그램은 정치적 편향성과 관련해서도 몇 차례 논란을 빚었다.

지난 4월에는 한나라당의 색깔론을 거론하는 과정에서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과의 인터뷰라며 엉뚱한 사람의 전화 목소리를 내보내는 방송 사고도 일으켰다. 이 일로 MBC는 ‘뉴스서비스’ 담당 국장과 책임 PD를 교체하고 ‘뉴스데스크’를 통해 사과방송까지 내보내야 했다. 탄핵 찬성 집회의 사회자가 대통령 영부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내보내는 과정에서는 왜곡 편집 논란이 일기도 했다.

― 가장 편파적이었다는 언론학회 보고서의 결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보고서의 주장대로라면 방송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고, 의제 설정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 보고서의 책임 집필을 맡았던 이민웅 교수는 MBC 기자 출신입니다. 제가 입사할 때는 이미 회사를 떠난 뒤였지만, 논문을 쓸 때 필요한 앙케트 등을 저희한테도 돌렸던 분입니다. 저희 프로그램을 모니터하기도 하는 사이였죠. 보고서가 발표된 후 취재를 위해 전화했더니 심한 말을 하고서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더군요.”

― 언론학회 보고서는 ‘뉴스서비스’가 일방적으로 탄핵 반대쪽에 기울었다고 지적했는데요?
“방송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TV가 탄핵안 처리 장면을 생중계하는 것부터 문제 삼았어야죠. 현장중계를 시작하는 순간 이미 기계적인 공정의 틀은 깨지는 셈이죠. 어떤 사안에 대해 20분짜리 테이프 한 개 분량의 취재를 했다면, 그래서 테이프 전체를 편집 없이 방영한다면 그게 반드시 공정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 탄핵 관련 보도를 하면서 ‘나중에라도 공정성 시비가 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했나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국민이 탄핵은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것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의무라는 생각으로 방송을 했으니까요.”

― 언론학회 보고서가 그 후의 프로그램 제작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습니까.
“보고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없습니다. 보고서가 잣대로 삼는 것이 기계적 중립인데, 예를 들어 행정수도이전 문제의 경우 찬반이 분분하다면 의견을 균형있게 반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신문이 내세우는 반대론의 근거에는 억지에 가까운 것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평가는, 설령 그것이 기계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더라도 반영할 생각입니다. 언론이 평가해야 할 사안이라면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들 얘기하니 기분 나쁘겠죠”

― 탄핵 사태는 지난 총선의 최대 변수였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방송의 탄핵 관련 보도가 열린우리당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 아닌가요?
“방송 때문에 그렇게 됐다기보다 방송을 통해 실상이 정확히 전달됐기 때문이라고 봐야죠. 방송은 탄핵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했거든요. 일부에서는 방송이 감성적으로 접근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방송 매체의 특성을 발휘하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방송의 속성 자체가 효과를 발휘한 것이지, 누가 무슨 작용을 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 일부 신문을 가리켜 ‘저들 신문’이라는 표현을 쓰신 적이 있는데, 방송 용어로는 지나치지 않습니까.
“기분 나쁘게 들은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것은 ‘저’라는 지시대명사의 복수형일 뿐이었습니다. 가운데다 ‘분’이라는 경어를 넣지 않았을 뿐인데, 마치 비하하는 것처럼 들린 것이죠. ‘비가 오시는데’ ‘옷이 예쁘시네요’처럼 경어가 남발되는 시대이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전혀 문제될 게 아니었다고 봅니다. 경어를 붙여 플러스를 하지 않았을 뿐, 비하해서 마이너스를 한 건 아니었습니다.”

― 내부 심의에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나요?
“물론입니다. 방송 용어상 문제될 게 없는데요?”

― 야당에는 가혹하면서 정부 여당에는 너그러운 것 같은데요?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쪽(정부 여당)하고 일절 커뮤니케이션이 없어요. 물론 상대적으로 야당을 많이 공격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동영·김근태 두 사람이 장관 자리 놓고 티격태격하는 것을 우리만큼 신랄하게 비판한 데도 없어요. 그때 제 코멘트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런 자세로 대권을 염두에 둘까 걱정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 프로그램 진행 때의 멜빵차림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예능국 출신인 최원석 PD의 작품입니다. 영화에 자주 나오는 언론인 이미지이고, 비디오적 효과도 있다는 뜻에서 나온 아이디어였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PD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렇게 가기로 한 것이죠.”

― 동료, 크게 보면 동업자를 도마에 올리는 게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저는 출입처 기자를 해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취재 관행 등을 거론할 때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기는 합니다. 자기의 직업이나 몸담고 있는 회사 얘기를 하면 처음에는 누구나 기분 나쁠 것입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한 문제제기가 결과적으로는 동료 기자들을 자유롭게 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출입처 돈으로 공짜 여행가는 관행을 고발한 뒤 저희 회사는 모든 출장을 회사 비용으로 갑니다. 내 돈 내고 가면 떳떳하고 편하지 않습니까. 본인이 쓴 기사가 전혀 딴판으로 윤색되거나 엉뚱한 제목이 붙어 나가는 경우도 줄어들 것이고요. 그러면 일하기가 더 편해지는 것 아닙니까.”

― 공격당하는 측의 반격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까.
“신문이 방송을 감정적으로 공격할 때 저나 저희 프로그램을 맨 앞자리에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한 일방적 비난을 사람들이 그대로 믿어버릴까봐 조금은 걱정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고민해야 하는 이슈가 적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사회가 불안정하다 보니 논란거리가 자주 등장하고, 그럴 때마다 사회가 동요하는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시청자나 독자들이 뉴스나 신문에 영향받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이러다 적을 너무 많이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것 같은데….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면 가해자 격이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방송 후 그런 분들과 다시 만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 때문에 마음고생했던 과장급 공무원들이 지금은 국장들이 됐는데, 다들 저를 피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주 만나요. 안 좋은 취재로 만났다고 원수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언론계 내부의 문제를 놓고 시각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적이 되라는 법은 없는 것 아닙니까. 적이라기보다 경쟁자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신문이 미디어 면을 통해 방송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방송이 신문 보도의 잘하고 못한 점을 다루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라고 저는 봅니다.”

― 프로그램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았나요?
“저희가 각별히 경계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일부에서 의심하는 것 같은 무슨 교감이니 관계니 하는 것은 일절 없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요. 방송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신문만 때리느냐는 얘기도 나오지만, 그와 관련해서도 나름의 구상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저희 프로그램에서 이를테면 드라마 비평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로 구성원들과 가끔 부닥치는데, 드라마나 주부·교양·오락 프로그램까지로 비평의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방송의 내부고발자가 돼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 방송에서 얼굴이 알려지면 정치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생각은 없습니까.
“저는 방송에 몸담다 정치로 간 사람들 욕을 무지하게 했습니다. 과거 새로운 민방이 개국할 때 저희 회사 기자들이 옮겨간 경우가 많았죠. 주로 정치부 기자들이었는데,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정치부 기자를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갔다는 겁니다. 그때 제가 그 사람들 욕을 참 많이 했어요.

이런 저런 일을 고루 해 보는 것이 기자인데, 그런 속보이는 약속을 받고 회사를 배신하고 가다니, 그게 기자가 할 일입니까. 각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고 원로가 돼야죠. 다들 정치판으로 가버리면 우리 사회는 영원히 정치중심적인 사회가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정치쪽으로는 가지 않는 마지막 사람이고 싶습니다.”

― 사내결혼하셨다면서요?
“아내는 저보다 다섯 살 아래로, 입사 동기였습니다. 국제협력부에 10년 동안 근무하고 퇴사해 지금은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 부인이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해 주시나요?
“너무 강한 톤으로는 얘기하지 말라는 등 조언을 많이 해주죠. 하지만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일에 소홀할 때가 많아 불만이 많아요. 남들 어려움은 몸을 던져가며 해결하면서 집안일은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고 공격해올 때는 참 난감하더라고요.”(웃음)

― 주량은?
“원래 술을 거의 못합니다.”

― 시간이 나면 뭘 합니까.
“일이 없을 때가 가장 갑갑하게 느껴집니다. 다음에 무슨 일을 할까, 이 기사에는 뭐가 또 숨어 있을까 궁리하면서 시간을 보내죠.” (웃음)

그는 MBC 내부에서도 ‘스타 기자’로 인정받고 있다. 아침 뉴스나 마감 뉴스의 앵커가 바뀔 때 그만큼 자주 앵커 후보로 거론된 경우도 드물다. ‘고발 기자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이유로 고배를 마신 적도 있지만, 적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더 해보고 싶다며 스스로 사양한 경우도 많았다. ‘미디어 비평’ 진행을 맡으면서 뉴스 앵커 문제와 관련해서는 ‘엄기영 선배처럼 조금 더 나이 들어서도 좋은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당분간 자신의 이름을 단 ‘뉴스서비스’에 충실하겠다는 뜻에서다.

그는 “‘뉴스서비스’가 편안하고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을 때까지 계속 맡아볼 생각”이라며 “우선 언론계의 동업자들이 프로그램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고 건전한 경쟁자로 받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카메라 출동’ ‘2580’ 등으로 심층·고발 기자의 이미지를 키워온 ‘스타 기자’ 신강균. 그는 언론 비평이라는 ‘생소한’ 분야로 옮겨온 이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동업자의 ‘아픈 곳’을 찌를 수밖에 없는 처지인 그가 어떤 능력을 발휘해 스스로 기약하는 ‘좋은 기회’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 관심이다. 그는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출처 : 월간 중앙 2004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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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정혜정 - MBC 가이드 

 

대한민국 최고의 ‘고발 전문 기자’

기자 생활 13년 동안 고발 프로그램인 <카메라 출동>과 <시사 매거진 2580>에서 8년 반을 보낸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고발 전문 기자'이다. <시사 매거진 2580>의 신강균으로 남고 싶다는 그는 힘없는 약자들 편에서 파수꾼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한다.

어스름한 새벽 무렵, 정적이 흐르던 영종도 신공항 건설 현장에는 조명을 설치하는 손길이 바삐 이어졌다. 벽과 천장, 바닥 할 것 없이 갈라진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바닷물, 1미터 간격으로 바닷물꽃이 피어오르는 부실 공사의 실태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공사가 멈춘 그 시간에 촬영을 서두르기 위해서다.

3월 14일 그는 <시사 매거진 2580>에서 영종도 신공항의 부실 공사를 고발했다. 여객 청사는 물론 활주로 지역 등 모든 지하 시설이 물바다가 되도록 잘못된 방수 공사, 개통도 하기 전 균열과 누수로 얼룩진 신공항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다시 한 달 후, 첫 방송 직후 나온 신공항측의 해명서를 그는 다시 한 번 조목조목 따져본다.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으로 신공항건설공단측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집요하며 논리적인 추가 질문으로 공단측의 주장이 엉터리임을 증명해보였다.

그 방송이 나간 후 시청자들의 반응은 “하나하나 사실에 입각한 반박, 대단한 용기와 프로 정신이 낳은 최고의 고발이었습니다. 더욱 파고들어가 그들이 고칠 때까지 물고 늘어지고 나아가 또다른 부실을 파헤칩시다”, “전문성과 논리성, 그리고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분석을 통해 진행된 점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영종도 관련 2차 보도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등이있다. 방송을 보지 못한 시청자라면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의견들이다.
감사원 관계자들도 그를 두고 ‘대한민국 최고의 고발 전문 기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선후배 동료들에게도 ‘기자 중의 기자’라는 평을 듣는 신강균 기자, 그는 어떤 사람인가?

“기사거리를 물었다 하면 절대 놓지 않고, 걸렸다 하면 끝을 보는 사람이에요. 이거다 싶으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일에 뛰어들어 아주 신나게 일하죠.” <시사 매거진 2580> 팀의 정태성 차장은 또 덧붙인다. “목소리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음색과 말투 때문에 녹화를 시작하면 글에서 드러나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되죠.” 같이 일하는 기술 스태프들도 녹화를 하면서 그의 힘 있는 목소리에 감탄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리포트가 빛을 발하는 것은 그가 뛰어난 인터뷰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무엇보다 그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3년 전 필자의 미국 유학 시절, 미국의 대표적 고발 뉴스 프로그램인 CBS <60 Minutes>의 리포터 마이크 월리스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28년 동안 일해온 취재 경험담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위트 넘치는 그의 분위기였다. 일단 웃음으로 분위기를 풀어가는 이야기꾼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뛰어난 인터뷰어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인터뷰 대상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인터뷰어로서의 첫째 조건이다. 신강균 기자는 비리를 파헤치기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도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고 공격적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인터뷰 대상을 주눅들지 않게 해서 자연스럽게 말이 술술 나오도록 하는 것은 분명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는 또 철저한 준비로 유명하다. 건축을 전공하지 않고도 전문가보다 더 치밀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라면 그가 얼마나 책과 씨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그는 스스로에게만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취재를 나가는 스태프들에게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출 것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영종도 보도 외에도 그를 기억하게 하는 보도는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 1995년 캐나다에서 열린 <반프 TV 페스티벌>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 <키 작으면 취직 못한다>를 빼놓을 수 없다. 기업들의 외모 제한 기준에 걸려 취직하지 못하는 여상 졸업생들의 아픔을 다룬 작품이다. 국회의원 회관의 목욕탕을 다룬 <선량인가 한량인가>, 전국 각지의 수돗물 정수장의 불결함을 고발한 <70년 만의 청소> 등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입사해 기자 생활 13년 가운데 3년 반을 <카메라 출동>에서, 또 <시사 매거진 2580>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만 5년을 2580부에서 지냈다. 올해로 방송 31주년을 맞은 <60 Minutes>의 리포터들처럼 앞으로도 <시사 매거진 2580>의 신강균으로 남고 싶어 한다. 다리품을 팔아야 하고 심적인 부담이 크다는 고발 프로그램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발 기사는 제가 전문이지요. 눈에 힘을 주면 사납게 생겨서 잘 어울린데요.” 그는 이렇게 먼저 사람을 웃긴다. “고발 기사는 보통 일반인들의 제보에서 출발하지요. 억울한 사람들 얘기가 많은데 내가 그 입장이라면 얘기를 잘 들어주고 받아주는 사람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취재를 하면서 억울한 사연이 조금씩 드러나고 진실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질 때의 기쁨 때문에 일한다고 할까요. 억울함이 풀리면 저도 기쁘더라구요.”

그가 꿈꾸는 기자의 모습은 얼핏 소박해보인다. 남들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연에 귀기울여 줄 수 있는 ‘마음이 따뜻한 기자’가 되고 싶다는 그. 제 잘못보다는 남의 잘못을 탓하고, 들으려 하기 보다는 말하려 하는 사람이 많은 시대에 낮게 엎드려 눈과 귀를 맞추는 기자, 이런 파수꾼이 있는 것이 참으로 고맙다.

신강균 프로필

방송인
출생 1959년 5월 11일
데뷔 1986년 MBC 입사
학력사항
경동고등학교
건국대학교 법학
고려대학교대학원 법학
수상내역
1990 한국방송대상
1990 한국 기자상
1990 한국방송대상
MBC '카메라출동'
MBC '시사매거진 2580',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