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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붙어 살아남은 자들의 환호- 한겨레 21 안수찬

pudalz 2021. 6. 17. 01:30

빌붙어 살아남은 자들의 환호

한 세기에 이르는 조·중·동과 권력의 유착…
총독부 ‘허가’와 신군부 ‘통폐합’ 등 언론시장 개편 때마다 쑥쑥 자라

 

 

언론 관련 3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튿날인 7월23일 <중앙일보>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이랬다. ‘신문·방송 겸영 금지 29년 만에 풀렸다.’ 여기서 29년 전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 직후를 말한다. 이 제목은 현기증을 부른다. 신군부의 언론 말살 정책이 29년 만에 해소됐다는 뉘앙스다. 1980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때 <중앙일보>를 비롯해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어떤 일을 겪었을까?

미디어 관련 3개 법안의 날치기 통과는 보수 정권이 조·중·동에 전하는 ‘종합선물세트’의 결정판이다. 3개 보수 신문사는 역대 보수 정권의 그늘 아래서 거대 기업의 살을 찌웠다. 1980년은 그 가운데서도 전형적인 시기였다. ‘보수 신문 경영 활로 개척 대행, 29년 만에 재현됐다.’ 이게 더 솔직한 기사 제목일 것이다. 80년대에 끝난 줄 알았던 보수 정권의 ‘보수 신문 배양’ 정책은 그렇게 다시 등장했다. 그 역사는 제법 길다. 거의 한 세기에 이른다. 수법은 같다. 편집자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왼쪽부터). 사진 <한겨레21> 류우종·한겨레 김명진·박종식 기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20년에 창간했다. 일제 총독부가 유화정책의 방편으로 이들 신문 발행을 허용한 것은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역사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1910년 한-일 병탄 이후 한글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 2개였다. 반면 일본어 신문은 <경성일보> 등 16개에 달했다.

1919년 3·1운동은 이를 역전시켰다. 3·1운동 전후 전국적으로 한글 지하신문이 발행됐다. <조선독립신문> <각성호> <노동회보> 등 50여 종의 한글 신문이 전국 각지에 출현했다. 총독부 허가를 받지 않았으니 ‘지하신문’이지만, 유일한 ‘자유언론’이기도 했다. <조선독립신문>의 경우, 창간호 1만 장이 삽시간에 배포됐고, 군중들이 이를 다시 등사판에 찍어 퍼뜨렸다.

총독부의 ‘간택’, 역사가 시작되다


‘지하’ 자유언론을 틀어막으려고 총독부는 한글 민간 신문 발행을 허용했다. 수십 건의 신청서가 접수됐다. 그러나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 등 3개 신문의 창간만 허락했다. 일제 치하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던 김을한이 1975년에 펴낸 <한국 신문 야화>라는 책이 있다. “민간 유지들은… 신청서를 제출하고 격렬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결국 3개의 신문을 허가했을 뿐이었다.”

<시사신문>은 창간 직후 자체 폐간했다. 결국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 총독부로부터 ‘간택’받아, 시장 과점권을 부여받은 셈이다.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는 친일 상공인 단체인 대정친목회였다. <시사신문>을 만든 것은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회였다. <동아일보>는 ‘민족지’를 표방하긴 했지만, 초대 발행인 이상협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국장 출신이고, 초대 사장 박영효는 한-일 병탄에 공헌한 대가로 후작 지위를 받았으며, 사실상 경영자였던 김성수는 일제의 농민 수탈에 기대 조선 제일의 지주가 된 인물이었다. 다음은 <조선일보> 1985년 4월19일 기사다. “일부 토착 귀족, 지주 세력은 식민통치의 가장 중추적인 동맹군이었습니다. 결국 귀족·지주·친일 언론인으로 혼성된 측에 허가된 것이 동아일보였고, 상공인 집단에 주어진 것이 조선일보였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 두 번째 ‘자유언론’의 시기가 왔다. 1945년 말까지 40여 종의 신문이 새로 창간됐다. 당시 유력지는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중앙신문> 등이었다. 언론인 송건호는 <한국 언론 바로 보기>라는 책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세련된 편집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조선인민보>는 비교적 공정한 논조로 어떤 정치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은 <자유신문> 및 <중앙신문>과 더불어 그 무렵의 언론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 신문을 ‘좌익 신문’으로 몰아 폐간시켰다. 1947년 이후 40여 종의 신문이 폐간·정간 처분을 받았다. 미군정은 대신 ‘우파 신문’을 키웠다. 다시 한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혜택을 받았다. 발행이 끊겼던 <동아일보>는 1945년 11월 말 속간을 알리는 전단에 “(미)군정 당국의 호의로 경성일보사의 일부 시설을 이용케 되어 준비 중입니다”라고 밝혔다. <조선일보>도 1945년 11월23일 속간사에서 “우리 조선일보는 군정청의 호의적 지지와 이해 있는 알선에 의하여 오늘부터 재기한다”고 밝혔다. 미군정이 몰수했던 총독부 재산을 이들 신문사에 다시 제공한 것이다.

1948년 8월15일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잔존한 신문들을 다시 폐간했다. 1949년 6월 초순까지 56개 신문이 정간·폐간됐다. 진보 성향의 신문은 모두 사라졌다. 한국언론인연합회가 펴낸 <한국 언론 100년사>는 “좌익계 신문이 자취를 감추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우익계 신문들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신군부의 언론사 통폐합은 언론사 대표들의 협력 아래 이뤄졌다. 1980년 11월, 언론사 대표들이 자필로 쓴 언론통폐합 각서. 사진 한겨레 자료

신방 겸영 허용은 박정희 정권 때

박정희 정권은 이들 보수 언론을 본격적으로 후원했다. 1960년 4·19 직후 세 번째로 찾아온 ‘자유언론’의 시기에 여러 신문들이 다시 창간됐지만,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박 정권은 대대적인 통폐합을 단행했다. 그해에만 1170종의 일간지 등 간행물이 폐간됐다. 살아 남은 언론에는 각종 특혜가 베풀어졌다.

쿠데타 직후에 발표된 ‘언론에 대한 기본 방침’에는 각종 육성 대책이 포함됐다. 자금 융자, 수입관세 인하, 세금 감면 등이다. <한국 언론 100년사>는 “건전한 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사실상 언론의 비판적 저항성을 구조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1967년 당시, 일반 대출금리는 25%였다. 신문사는 18%의 금리만 냈다. 당시 일반수입관세는 30%였다. 신문사는 신문용지를 수입하면서 4.5%의 관세율만 적용받았다. 한-일 협정을 전후해 일본에서 들여온 상업 차관 가운데 4백만달러가 <조선일보>의 몫으로 돌아갔다. 국내 금리가 26%인 데 비해, 차관의 이자는 연 7~8%였다. 그 돈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으로 일본에서 받아낸 대일 청구 자금이었다. <조선일보>는 이 돈으로 코리아나호텔을 지었다. 기간산업도 아닌 관광호텔 건립에 외자를 배정할 수 없다며 경제기획원의 실무담당자가 관련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당시 신문사 대부분이 급격하게 사세를 확장했다. 1968년 <조선일보>의 사옥과 호텔 건축, 1962·68년 <동아일보>의 사옥 증축, 1965년 <중앙일보>의 사옥 신축 등이 대표 사례다. 박 정권은 눈엣가시 같은 신문사들을 폐간하면서도 본격 상업주의를 표방한 <신아일보>(1965년)나 거대 재벌이 운영하는 <중앙일보>(1965년)의 창간을 허용했다. 박 정권 때 새로 창간된 ‘유이한’ 중앙일간지들이다.

이른바 신문사의 ‘신방 겸영’을 허용하고, 재벌의 언론사 경영 참가를 눈감아준 것은 바로 박정희 정권이었다. <동아일보>가 1963년 라디오 방송을 개국했다. 삼성은 1964년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을 개국한 뒤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했다. 박 정권이 사실상 직할했던 문화방송은 1974년 <경향신문>을 흡수 합병했다. 그 밖에도 호텔업, 광고업, 레저산업 등에 신문사들이 속속 진출했다. <동아일보>의 경우, 1961년 전체 매출 가운데 다각 경영의 수입 비중이 4%에 불과했지만, 1970년에는 29%로 늘었다. 196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8~10%였지만, 신문기업만큼은 연 20%씩 성장했다.

1981년~87년, 6대 일간지 매출 3배 늘어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방식을 확대 적용했다. 1980년 5월 쿠데타 직후, 신군부는 적어도 1900명 이상의 언론인을 해직했다. 전국 64개 언론사 가운데 신문 14개, 방송 27개, 통신 7개사를 통폐합했다. 대신 나머지 신문사들을 대상으로 윤전기 도입 관세를 20%에서 4%로 인하했다. 상업인쇄, 스포츠사업, 부동산 임대 등 추가로 다각 경영을 허용했다. 신문사들이 16종의 잡지를 새로 발행하는 것도 허락했다. 5년 동안 해외시찰, 해외연수, 자녀학자금, 취재수당 면세, 주택자금 융자, 생활안정자금 제공 등의 명목으로 300여억원을 기자들에게 제공했다.

신군부는 <동아일보> 소유의 동아방송, <중앙일보> 소유의 동양방송을 한국방송에 통폐합했지만, 3개 보수 신문사는 그 반대급부를 톡톡히 챙겼다.

‘살아남은’ 6대 중앙일간지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81년부터 1987년 사이, 6대 일간지 매출은 세 배나 늘었다. 같은 시기, <동아일보>의 자본 총계는 4.5배가 늘었다. 1981년부터 1986년 사이, <조선일보>의 윤전기는 14대에서 24대로 늘었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나란히 15대에서 21대로 늘었다. 특히 <조선일보>의 매출은 1980년 161억원에서 1988년 914억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동아일보>의 매출이 265억원에서 885억원으로 늘어난 것과 비교해도 돋보이는 성장이었다.

<한국 언론 100년사>는 “통폐합 등 언론기관 개편이 있을 때마다 남아 있는 언론 기관은 경영이 더 호전됐다. 살아남은 매체는 독과점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기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1980년은 한국 보수 신문들에게 역사적인 해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국내 100대 기업의 반열에 드는 것은 물론, 더 이상 후발 주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고도의 규모를 갖췄다. 한국언론재단이 발행한 <2008 언론 경영성과 분석> 자료를 보면, 2007년 현재 매출액은 <조선일보> 4031억원, <중앙일보> 3420억원, <동아일보>는 2803억원이다. 분사한 자회사 등을 고려하면 액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같은 시기 <한겨레>의 매출액은 760억원이었다. ‘신방 겸영’이 가능한 신문사는 오직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뿐이다.

드러내놓고 밥그릇을 챙겨주다

3개 보수 신문사는 총독부, 독재정권, 군사정권 등을 거치며 과점 시장을 보장받아왔다. 그 시기 동안 이들이 양심적 언론인을 내쫓고 권력에 영합하면서 어떤 왜곡 보도를 했는지에 대해 적으려면,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정권 차원에서 언론사 경영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는 일은 사라졌다는 점이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잇는 지난 20여 년 동안 권언 관계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어느 정권도 보수 신문사의 밥그릇을 드러내놓고 챙겨주진 않았다. 이제 정부는 3개 보수 신문사 앞에 방송 시장을 새로 열어줬다. 참 오랜만의 일이다.

참조 자료: <권력변환>(인물과사상사), <한국 언론 100년사>(한국언론인연합회), <한국 언론의 사회사>(지식산업사), <2008 언론 경영성과 분석>(한국언론재단), <새로 쓰는 한국 언론사>(아침), <80년 5월의 민주언론>(나남출판), <자유언론>(해담솔)

안수찬 기자 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