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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센지 신문이 센지 해볼 테냐" - 오마이뉴스, 김주언

pudalz 2021. 5. 15. 23:57

"권력이 센지 신문이 센지 해볼테냐"

[기고] 김주언 전 언론재단 이사... 언론사주-권력은 어떻게 유착했나

05.08.30 14:09l최종 업데이트 05.08.31 00:18l

김주언(news)

 

친일인명사전 1차명단 발표에는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주와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자,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 등이 전쟁협력과 친일단체 가입 등의 이유로 친일인사에 포함됐다. 이들이 창간하거나 키운 신문사들은 해방 뒤에도 권언유착, 정언유착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세 신문의 사주들이 어떻게 정치권력과 유착해왔는지 살펴본다. 필자는 김주언 전 언론재단 이사다. [편집자말]
 
 
 
▲ 한국의 신문사주들은 정치권력에 굴종 또는 유착하면서 막강한 힘을 키워왔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한국의 신문사주들은 정치권력에 굴종 또는 유착하면서 막강한 힘을 키워왔다. 신문사에서 제왕적 권력을 행사해온 신문사주들은 독재정권 시절에는 절대권력을 지닌 대통령에 아부하거나 굴종하면서 '밤의 대통령'으로 행세해왔다.

그러나 1987년 6·10항쟁 이후 권력의 공백기 신문사주들은 “대통령을 만들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 '낮의 대통령'을 노리는 권력기관으로 행세했다. 신문사주의 대표적 굴종사례로는 1989년 10월 26일 저녁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 4명의 신문사주가 청와대에 함께 모였던 일을 들 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과 신문사주 4명의 만찬

언론이 자신의 방미사실을 작게 다룬 데 대해 서운함을 느낀 대통령이 다음부터 기사를 좀 크게 내달라고 부탁하기 위한 초청자리였다.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자 A사장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각하, 제 술 한잔 받으시죠.” A사장은 동동주를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순간 대통령은 당황했다. “아니 편하게 앉으시죠.” “아닙니다. 저는 이게 더 편합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B사장이 “각하, 각하 하는 것은 옛날 호칭 아닙니까”라고 면박을 주었다. A사장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나는 일제시대 때 교육을 받았으니 옛날 식으로 하는 것 아니오. 해방 후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하고는 다르지”라고 응수했다. B사장은 “아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너무 어린애 취급하면 곤란합니다. 나도 환갑이 내일 모레입니다”라고 화를 내며 위스키 한 병을 따로 시켰다.

B사장은 양주병을 들고 대통령에게 “자, 제 술도 한잔 받으시죠”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미안합니다.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투지 마시고 즐겁게 마십시다”라고 분위기를 잡았다. 그러나 더 어색해지자 대통령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고 A사장은 B사장에게 화를 냈다. “나는 자네보다 인생 경험도 많고 언론계 선배이기도 한데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나. 나는 자네 아버지한테 그렇게 대하지 않았어.”

B사장이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아버님까지 들먹거릴 필요는 없지 않소”라고 말하자 A사장은 “뭐라고. 이게 무슨 말버르장머리야. 너 혼 좀 나볼래”하고 되받았다.. 두 사장은 멱살을 잡고 싸웠고 다른 사람들이 간신히 말려 술자리가 끝났다. 코미디같은 이 이야기에는 아부와 굴종, 배신이란 언론과 권력의 함수관계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유독 특정신문 사주만 뽑아 이날 청와대 회식자리에 초청했다. 이들 사주만 잡으면 언론 논조를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방미 기사가 작아서 미안하다”며 무릎 꿇고 술잔을 바치던 사주는 뒷날 사보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참 싱거운 사람이다. 특색이라면 외유를 선호했고 그때마다 크게 써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고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굽실거리다가 죽은 권력에는 발길질하는 기회주의적 모습이다.

박정희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

   
 
▲ 8일 별세한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
 
 

권력화한 언론의 모습으로 흔히 인용되는 '밤의 대통령'은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2003년 8월8일 작고)을 일컫는 말이다. 1992년 11월 당시 방 회장 고희연에서 사원대표인 신동호 스포츠조선 대표가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분이셨다”라고 말했다고 조선일보 사보에 실린 것을 <기자협회보>가 다시 보도하여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신동호 대표의 조어가 아니다. 이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낮의 대통령’ 박정희였다. 방 회장은 당시 박 대통령의 가까운 술친구였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 대통령이 요정에 가보면 방 회장은 화술로나 주량으로나 늘 좌중을 휘어잡았다. 방 회장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한번은 박 대통령이 방 회장의 흑석동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기생들을 불러 술판을 벌였는데 박 대통령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며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불렀고 나중에는 '미꾸라지 잡기'라는 일본 민속무까지 멋들어지게 추었다는 일화도 있다. 나이는 박 대통령이 다섯 살 위였지만 술집출입 경력으로 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 보나 방 회장은 ‘촌놈’ 박 대통령보다 한참 위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 회장을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 당대 풍류객이고 한량이라는 얘기다. 조선일보가 펴낸 방 회장 전기에 “권번출신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사람이 바로 방 회장이란 이야기까지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박 대통령이 그렇게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재임시 1년에 한 두번 의례적으로 신문사 발행인을 한자리에 불러 환담을 나누었다. 자주 독대한 신문사주는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과 동아일보 김상만 사장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은밀한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만하다.

조선일보사는 1967년 박 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건물과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4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들여왔다. 코리아나호텔이 세워질 당시 조선일보 구 사옥 일부가 도시계획에 포함돼 있었으나 유일하게 철거되지 않았다. 차관 도입시 조선일보 경제부에 근무했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코리아나호텔 건립을 위한 자금은 1967년 대일청구권 자금 중 상업차관으로 들여온 것이며 언론사가 도입한 상업차관으로는 첫 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국내금리가 연 26%나 됐던 것과 비교하면 연 7∼8%에 불과한 상업차관을 허용한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임에 틀림없다. 당시 상업차관을 주선한 사람은 방일영씨와 막역한 사이이며 공화당의 돈줄로 통하는 김성곤씨로 알고 있다.”(김해식 <한국언론의 사회학> 나남 1994. 119∼120쪽)

신문사주의 잇따른 정계 진출

신문사주로서 정치권력에 들어선 사례는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일보 창업주인 백상 장기영씨(1977년 작고)는 1964∼1967년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를 지냈다. 백상은 박정희 정권 출범 당시에도 초대 내각의 국무총리로 거명됐으며 1963년 8월 박정희 친서를 받아 극비리에 일본에 건너가 양곡을 구해오는 등 이미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상은 부총리 취임이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한일협상에도 관여했다. 백상은 3년5개월의 재임기간 중 경제성장의 기틀을 닦는 업적을 남겼지만 국회에서 3차례나 해임결의 대상이 되었다.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과 편파대출 파문, 한국비료 사카린밀수 사건 때문이었다. 특히 한국비료 사건으로 김두한 의원에게 오물세례를 받은 일은 장기영의 오욕을 상징하는 것이다.

백상과 비슷한 시기에 언론사주이면서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로 성곡 김성곤씨(1975년 작고)를 꼽을 수 있다. 성곡은 1945년 10월 영남일보를 창간했으며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부사장으로 있다가 1953년 동양통신 사장이 됐다. 성곡은 1958년 자유당 공천을 받아 여당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동양통신은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연합통신에 넘겨졌다.

성곡은 1963년부터 1971년까지 경북 달성·고령에서 6, 7,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6대 국회에서 재경위원장을 지냈고 8대 국회 때는 집권당 공화당의 재정위원장과 중앙위원회 의장을 맡으며 이른바 주류 4인방을 이끄는 실세로 부상했다. 하지만 1971년 1월 2일 항명파동으로 정계에서 축출된다.

성곡은 사후 여러 비판이 제기됐다. 최근 국정원의 과거사 진상규명대상으로 거론된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건이 성곡의 아이디어에서 나놨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회고록에서 김성곤과 언론문제에서 결정적으로 대립했으며 언론탄압의 태두는 자신이 아니라 김성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의도는 다른 언론사를 수중에 넣기 위해서이며 대권도 꿈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뭐하러 선거하나, 신문사주가 모여 대통령 뽑으면 되지.. "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은 80년 당시 5·18광주민중항쟁을 유혈진압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그해 5월31일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문공분과 위원으로 활약했다. 국보위는 전국 비상계엄에서 행정과 사법 업무를 조정 통제하던 초헌법적 기구로 신군부 정권찬탈의 전초기지였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군부세력이 저지른 언론사 통폐합 과정에서 조선일보만 비껴갔다.

1990년대 들어 권언유착 행태는 권력주도형이 아닌 언론주도형으로 변한다. 1987년 6월시민항쟁 이후 언론자유가 어느 정도 주어지자 언론은 권력기관으로 등장, "대통령을 만들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빠지게 됐다. 언론이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된 것은 무엇보다 문민정부 탄생을 앞장서 지원했기 때문이다. 여론을 만들고 전파하는 언론이 특정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구실을 해온데 비결이 있다는 것이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를 가장 열심히 밀었던 언론사는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사설과 칼럼, 기사를 통해 '국민당 정주영 후보 죽이기'와 '김영삼 후보 키우기'에 앞장섰다. 국민당은 조선일보 취재를 일절 거부하고 신문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항전을 벌였다.

1997년 대선에서는 좀더 노골적인 '권력 만들기' 행태가 드러났다. 중앙일보가 노골적으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당시 국민신당은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등이 국민신당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신당지원설을 악의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며 "언론이 특정후보를 지원하려고 한다면 당당하게 지지사실과 이유를 밝혀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양대 대선에서 불거진 이러한 사태는 한국 언론의 일그러진 모습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 "비싼 돈을 들여 대통령 선거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신문사주들이 모여 대통령을 뽑으면 되지 않느냐." 권력과 언론의 실상을 잘 말해주는 경귀이다.

 
 
▲ 98년 1월 22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는 방우영 조선일보사 회장 칠순잔치에 참석해 축하케이크를 잘랐다. 사진은 당시 조선일보 보도.
 
 
 

김대중 대통령은 왜 김성수, 방우영을 극찬했나

그래서인지 새로 취임한 대통령은 신문사 발행인 등과 연쇄 회동하는 것이 관례였다. 심지어 1992년 대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조선일보 사주의 집을 직접 방문했다. 자신을 지지해준 데 대한 답례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낮의 대통령’과 ‘밤의 대통령’이 만나 새 정권에서의 새로운 파트너십을 다짐하는 자리로도 해석됐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직후 첫 번째 언론관련 행보는 동아일보였다. 1998년 1월15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도전적 작가 10인전' 개막식에 참석했다. 민간행사 참석 1호다. 김 당선자는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인촌 김성수 선생은 문화주의를 제창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했는데 참 큰 선견지명이 있으셨다"면서 "일민 김상만 선생도 많은 문화사업으로 유업을 받들었다"고 추켜세웠다.

두 번째 행보는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의 칠순잔치. 김 당선자는 1998년 1월22일 저녁 조선일보 본사 7층 강당에서 열린 방 회장 고희 출판기념회에 참석, 방 회장 왼쪽에 서서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잘랐다. 김 당선자는 "방 회장이 변함없이 한 길을 걸으며 대(大)조선일보를 만들어내고, 문화사업과 사학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을 높이 평가해 마지않는다"고 극찬했다.

김 대통령의 한 측근은 "1998년 초 외환위기 극복이 절체절명의 과제일 때였다"면서 "김 대통령은 지지도가 90%를 넘는 시기였기 때문에 잘만 하면 지역을 떠나서 고른 지지를 받을 수 있고, 나를 반대했던 언론도 잘 대하면 최소한 균형 잡힌 보도는 하게끔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 초기 언론의 행사라기보다 사주의 행사에 가까운 자리까지 참석하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껴안으려는 행보를 보였지만, 집권 내내 그들로부터 만신창이가 되도록 물어 뜯겼다.

"권력이 센지 신문이 센지 해볼 테냐"

언론은 정책결정에 대한 영향력뿐 아니라 때로는 횡포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북한 핵사찰 문제로 시끄럽던 시절 모 외무부 장관은 청와대 보고시간에 늦어 혼쭐났다. 보고시간에 늦은 것은 모 신문사 사장과의 점심 때문이었다. 신문사 사장은 외국손님과 오찬을 빛내기 위해 외무장관을 느닷없이 호출했으며 장관은 반강제로 폭탄주까지 먹어야 했다.

언론과 알력으로 쫓겨난 장관도 많았다. 한완상 통일부총리가 조선일보의 집요한 밀어내기로 그만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황산성 환경부 장관이 일도 해보지 못하고 물러난 것도 언론에 밉보였던 측면이 강하다. 권언유착이 온존하면서 언론사가 투명한 경영을 하도록 유도하는 정책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특히 김영삼 정권은 언론사 세무조사를 해놓고도 조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아 언론을 길들이려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냈다.

김영삼 정권 초기 청와대의 핵심위치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언론을 개혁대상으로 꼽았다가 '왜 우리 밥그릇에 손을 대려고 하느냐'며 언론사주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했더니 몇몇 사주들은 청와대로 찾아와 협박을 합디다. '권력이 센지 신문이 센지 어디 한번 해볼 테냐'라고 말입니다. 이때부터 기가 꺾인 겁니다. 언론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신문시장의 60%이상을 과점하고 있는 몇몇 신문사주들에 대해서는 대통령도 홀대하기 어렵다. 유력 언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국가를 잡음없이 이끌어가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이기도 하다. 대통령들은 외국방문을 떠나는 날 아침 몇몇 신문사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다녀오겠다”는 인사말을 직접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신문사주의 만남은 대개 비공식으로 비밀리에 진행된다. 유력 신문사는 사주 요청에 따라 대통령과 종종 독대했고, 사세과시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들의 만남은 대개 국정여론 청취 등의 명분을 걸고 이뤄진다. 그러나 신문사주가 시중여론을 여과 없이 전달하고 국정운영에 대한 고언을 하는 자리이기만 했을까.

대통령 만난 신문사주들의 민원과 청탁

오히려 최고권력자에게 직접 ‘민원’을 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한 신문사주는 김대중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몇 가지 부탁을 했다. 서울 근교에 있는 땅 2만 6000여평의 용도를 택지로 변경해줄 것과 앞으로 사옥을 옮길 경우 비게 되는 건물을 정부가 매입해주거나 임대해 달라는 요구였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그 부탁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가는 어떤 난리가 일어났겠느냐”고 반문했다.

한 언론사는 청와대에 거액의 협조융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사주 요청을 받고 “수석비서관과 상의하시라”고 답변했으나, 해당 수석은 “금융기관에 대출압력을 넣기 힘들다”고 완곡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무리한 부탁’은 청와대로서도 난색을 표명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들어줄 수 있는 한도에서는 되도록 비위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그 대가는 물론 정부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는 것이다.

일부 신문사에서는 기존 은행융자를 이자가 싼 다른 융자로 대체해 달라는 부탁도 심심치 않게 한다고 한다. 정부는 자사출신 인사를 산하단체나 기관 등에 ‘심어달라’는 요구에도 최대한 성의를 표시한다. 그러나‘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거래 속에 언론의 몰골은 점차 초라해지게 마련이다. 신문사주의 굴절은 결국 사익(私益)을 챙기고 권력을 누리기 위한 자기모멸의 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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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7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