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1일 목요일
볼 해 은미샘과 아이캔 스피크를 보았다.
펑펑울었다.
영화를 보고 근처 추어탕집에서 점심을 먹고
한일병원 앞 커피숍에서 커피까지 마셨다.
밥은 은미샘이 샀고 커피는 볼이 샀다.
더치페이하자니까 사서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조조는 6천원이었다.
영화를 보고 집에 와 좀 쉬고 힐링농장에 들렀다가 왔다.
새벽 5시에 자 9시가 못되어 깼다. 잠이 부족했다.
가슴이 죄어왔다.
집에와 밥먹고 졸렸지만 jtbc TV보는데 휴대폰을 보니
10시 반쯤 김용균 부장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앉아서 조는 사이 온 것 같다.
11시 40분쯤 주무실 것 같아 문자를 보냈더니 답이 없었다.
잠을 잤어야 했는데 새벽까지 자지 않았다.
9월 22일 금요일
오전에 깼는데 전화가 왔다.
김용균 부장이었다.
목소리가 심각했다.
정실장이 죽었다고 했다.
발인이 오늘이라고
늦게 알려 미안하다고 했다.
경북의 은혜사란 곳으로 갔다고 했다.
검색해보니 은해사와 은혜사가 있었다.
그때까진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후부터 점점 슬퍼진다.
뭔가 세상에 기댈 구석이 하나 사라진 느낌이다.
회사를 그만둔 지 10년도 넘었고
연락이 닿았던 것도 2번밖에 없었다.
모두 자존심 때문이다.
2번의 연락도 좋지 않았다.
2011년에 음주운전사고가 났을 때
도와달라고 전화를 드렸는데
욕만 한 바가지 먹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그후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전화가 한번 왔다.
난 김부장이 알렸나 했는데
내가 먼저 카톡으로 도와달라고 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나에게
정실장은 그런 사람이다. 인연이 끝난지 오래되었지만
날 출판계에 입문시켜 준 사람이라
늘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다는 무의식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뇌졸중이후 머리가 나빠지고 몸이 불편해지니까
살아남겠다는 생존본능만 남아 생각을 못했다.
얼마전에 그만둘무렵 마포아파트에서 펑펑울던 생각이 나서
그때 왜 그렇게 창피하게 울었는지 전화로 알려주고 싶었었다.
마음이 잡히지 않아 산에 가고 싶었는데
텃밭에 들렀다 가려고 갔다가 도봉동 소피스트아저씨를 만났다.
이야기 좋아하는 아저씨는 나와 산책을 하셨다. 나처럼 외로우신 가보다.
맨날 한 이야기 또하고 또하고 하신다. 그래도 배울 건 많은데
오늘은 정말 혼자서 정실장과의 지난날만 생각하고 싶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아저씨는 9시 까까이 나와 산책을 하시고 무수골에서
헤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정실장에 대한 그리움은 더 커진다.
나에게 정실장의 부재는 상실이었고
안타까움이고 미련이고 사랑이다.
나에게 알렸으면 행복하게 해드렸을 텐데.
내가 같이 일했으면 아프지 않았을 텐데.
나와 함께 텃밭을 가꾸어봣으면 치료에
도움이 많이 되었을 텐데.
얼마나 아팠을까 어느 정도 아팠을까
사회생활은 언제까지 한 것일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인터넷에 정실장을 검색해보앗다.
부고가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을 떠난 후 그리워 하는 이가
없는 상황이 두렵고 거친 황야같다.
많은 기사조각 인터뷰 등을 보고
그간 어찌 살았나 알 수 있었다.
내가 있었으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때 언론운동을 그만두고
다시 돌아갔으면 나도 좋고
정실장도 좋았을 텐데 하는
미련이 남았다.
가족도 자매뿐이고 자매들도 외국사니
아들 한이와 강선생밖에 없는데
장례를 잘 치뤘는지 모르겠다.
세브란스 병원이라니 잘 치뤘겠지
나에겐 어쩌면 그녀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일지 모른다.
나의 무의식 속에 그녀와와 해후가
있었다.
나의 치료하는 능력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을 텐데
난 너무 망가졌다.
설령 연락이 닿았어도 투병을 알았어도
아무 것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정실장이 두번째 전화를 줬을 때는
독하게 살라는 말 한마디였다.
도와주시고 싶지만 여유가 없다는
말도 했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떠나는 것이
나의 지난 기억과 추억 인생이 모두 떠나는 것임을
알겠다.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다.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인생은 늘 이모양인가보다.
산재재판만 용기를 내어 청구하고
보상만 받아 제대로 치료했더라면
조금의 여유만 있었더라도
한번쯤 연락을 해보았을 텐데
늘 마음에 담고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했던 말들이 하나 하나 떠오른다.
슬프다. 한동안 이 소용돌이에서 헤맬 것같다.
지난 밤 한강시민대학 주말강좌를 보았는데
무척 듣고 싶었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내가 꼭 들어야할 강좌 같았다.
하지만 들어도 까먹고 현장실습과 빡빡한 강좌스케쥴 때문에
신청을 할 수 없었다. 예전에 물고기를 위하여란
제목의 수질오염과 극복방안을 다루는 책을 써보려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쓰면 정실장이 있으면
좀 더 출간하기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담배를 끊고 더 많이 잤어야 했는데. 그녀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생 장녀로 집안 건사하고 부모님 책임지고
가정챙기고 자식키우고 일하고 회사운영하고
바친 인생이다. 타인을 위해 쓰느라
엄청난 설득능력과 추진력, 체화된 장인출판능력이 있었지만
시대와 사회를 꿰뚤고 구매자의 마음을 읽는 능력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이 없었다.
출판경영과 출판편집자로서 더 맞고 기획은 맞지 않다.
상호보완되는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하는데
강선생이나 나 같은 경우는 보완이 되고
뽑은 사람들은 그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난 교정교열능력만 익혔으면 사회에 필요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책을 참 많이 만들었을 텐데. 역시 아쉽다.
얼마든지 기회와 시간이 있었는데 일할 땐
쫓기느라 다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