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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7일 오전 05:29

pudalz 2015. 1. 27. 06:27

제프 아이들 보며
같은 나이 때의 내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내가 고 1인 제프 아이들 나이 때 신문배달을 했다.
아이들에게 내가 너희 나이 때
좋아하는 시귀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고
하나는
흙의 향연이 시작되는 날
그자리 멀리에서 난
또 다른 겨울 작품을 준비하라란
시였다.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매일 아침 맨손에 맨발로
운동화만 신고 매일 아침 40킬로는
뛰었단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편견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했다.
편견을 가자면 두려운 것이 많아지고
피하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사람들이 주는 가시돗힌 말, 시선, 무시
가난함이 주는 비천함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비열한 힘센 놈
그 무엇에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강해야 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들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비굴할 수 없었고 환경에 팔자에 굴복할 수 없었다.
강해져야만 남처럼 두려워서 타인을 공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가 짓으면 사람들은 공포에 떤다. 사실은 개도 사람이 두려워서 짓는데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격다보면 자신도 개처럼 공포스러운 존재 즉 타인에게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데 끊임없이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도 자신은 피해자라고
더 큰 소리로 짖게 된다. 사람들이 상처를 주고 받고 싸우는 일이
약해서 두려워서 란 걸 알았기 때문에 강해지려고 했다.
더러운 것은 만지지 않고 피하려고 하지만 더러운 것도 인간이 만들어낸 선입견
일뿐이다. 선입견이 없어야 생활의 구속을 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당당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남이 더러워하는 공동화장실 이불 밑 설겆이 등을 도맡아서 했다.
더러운 것을 반짝반짝하게 하면 사람들에게 강요할 권리가 생긴다.
남은 더럽고 귀찮아서 피한 일을 자신은 했기 때문에 남들도 내가 무서워하는 일을
한 사람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또 내가 치우면 내가 치웠기 때문에
타인에게 어지르지 말고 깨끗하게 쓰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일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싫어하는 무거운 신문덩어리들을 먼저
사무실에 넣어놓으면 할 말이 생긴다. 뒷정리나 쓰레기 치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을 해서 돈도 꽤 벌고 사업장도 내맘대로 하고 사장과 직원 동료 모두 내 말을 들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그들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하고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발은 꼭 미아삼거리 숭인시장에 있는 월드컵가게에서 조깅화를 샀는데 한달이 못갓다.

2시간 40분을 백미터 뛰듯 전속력으로 뛰었기 때문이다. 한 순간도 지지치 않았다

똑 같이 백미터 속도로 뛰었다.

너희도 피해의식 나쁜 기억에 매달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세상의 주인이 되어 요구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미루고 의심하고 남의 요구에
거부반응, 반항만 하지 말고, 너희와 같은 나이 때
매일 40킬로를 뛰고 돈을 벌고 내 의지대로 내 주변을 바꿀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나처럼 불행한 아이들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내가 세상을
구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무언과 정열과 갈망을 위해
게으름 반항 눈치 피해의식이란 이불을 털고 용감해지길 빈다. 그래서
타인에게 요구하길, 요구 이상의 선행까지 하는 가슴벅찬 삶을 살기를
세상의 생명 하나 하나가 얼마나 위대한지 절실하게 육체로 느끼는
삶을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좋은데.
똑 같은 사람이 불우함 불행함 약함의 껍질에서 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나오는 사람 그래서 넓은 세상을 자신처럼 껍질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데 너희는 어떤 사람이 될 거냐.



다른 문제의 또 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생각이 나질 않네
허허벌판 모래바람 흙이 눈에 들어가면 눈물이 난다.
그때 겨울에 겨울작품을 준비하는데 예술작품은
슬픔과 고통을 액면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슬픔과 고통을 바깥에서 보고 응시하고 초월해서
보편성을 띄어야 하는데 그런
작품을 바로 그 때 서러울 때 눈물날 때 분노했을 때
그 힘으로 만드는 것이다. 꼭
글과 말 소리로 표현하지 못해도
삶의 한 순간 순간이 작품이 되기도 한다.
결국은 나이가 오래고 보면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의
시선이 예술임을 이해하는 날이 오니까.

고 2 때 겨울방학에 혜화동에 있는 고대병원 중환자 대기실에서 두 달 정도생활했는데
그 때 진과 정이란
시를 썼다. 완성도가 없어서 친구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큰 형님이 유행성출혈혈로 중환자실에 한 달 넘게 있어
내가 간병을 했다. 24시간 내내 병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었다.
국민학교 5,6학년을 형님댁에서 살았는데 중학교때부터는 형님댁에서 기거하지 않았고
중3을 졸업하고는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삼환양행에서 회사생활하다 다시 고등학교를
다닐 땐 형님과 볼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형님댁의 생활이 어떤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친척들은 처음 겪는 생사를 오가는 형제의 일에 병문환와서
병원에 내내 있는 내가 형님과 함께 생활하는지 알고 간병하면서 밥사먹으라고 일 이만원씩

주고 가셨다. 어르신부터 모든 친척이 오셔서 꽤 많은 돈이 모였었다. 어디다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은다. 24시간 중환자실 생활하면서 새벽엔 잠깐 택시타고 가서 배달을 하고 왔다.

사람들은 내가 신문배달하는지 몰랐다. 우리 반 아이들도 몰랐다.

나는 그 때 김용옥의 동학혁명 tv강의 공산주의란 ? 신동아에 기고한 노태우전상서인가? 등을

보았고 언제나처럼 우주의 근원 세상의 근원에 대해 끊없이 고민했다.

철학선생님이 추천해준 책은 거의 샀다. 병원에 있을 땐 소동파 시집을 원문으로 많이 보았다.

신문지국에 굴러다니는 구운몽 원본도 한문으로 보았었고 한스카로사의 시도 독일어 원문으로

보았다. 보들레르부터 릴께 많은 시인의 시를 보았다. 시인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입시공부같은 건 해본 적이 없다. 이미 중3을 졸업하고 일년 내내 데모를 했고 중3 때는

수배중인 독서실 형들과 정치이야기를 하고 사회생활을 할 땐 어른들과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에 입시공부에 관심이

가질 않았다. 반 친구들과 생각의 격차가 너무 컸다. 관심사도

중환자 대기실에서 나의 성향을 미루어

나의 장래를 예언하는 시를 썼다.

진과 정

머무를 진과

가슴아픈 정

둘이 만났어 나와

헤어질 땐 가슴아팠지만

진과 악수하고

정과 갔어 나는.

당시에 유행하는 유안진이나 동류의 영향을

받아 자칭 시풍이 가벼웠다.

시인의 칭찬을 들은 그 때 쓴 꽤 괜찮은 시들도 몇 개 있다.

 

나는 왜 이 시이야기를 떠올렸을까 뭔가 이유가 있는데 또 생각이 나질 않는다.

뭔과 요즘 돌아가는 세태에 할 말이 있어서 전부터 계속 떠올랐는데

생각이 안 나네. 결국 형님은 돌아가셨다. 다음해엔 엄마가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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