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6일 화요일 아침
10시에 깼다. 12시까지 누워있다가
보험회사 해약안내전화받고 일어났다.
해약했다. 청약안내자의 과실, 안내책임에 대해
따지고 싶다.
밥먹고 아침일기를 쓰려고 앉았다가
유튜브에서 이미자 노래 들었다.
오른쪽 허벅지가 많이 당긴다. 엉치뼈와
아 생각났다
사과하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앉았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참여당이 합당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닌 것을 사과해야 하는데
김윤환위원장 장례식장에서 만난 혜신에게 사과하고
몇 사람에겐 말한 것 같은데 여러 사람에게
철없이 선무당이 사람잡듯 정당의 생리 정치의 속성
당원의 생리를 모른 채 합당해야 한다고 하고 다닌 것에 대해
합당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몇 년동안 마음에만
담고 하지를 못했다. 또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해가 가고 올 때 마다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한 일
몇 가지 미안한 일이 마음에 남아 있다.
홍세화 선생님이 한일병원 희망텐트에 오셨었다.
참여당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지역에서
출마하고 활발히 정치활동하던 이백만씨 등이
아줌마들의 복귀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신의 계시라며 3당이 합당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두고 두고 부끄럽다.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약자한와 이웃을 세상을
사랑한다면 서로 뭉쳐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지 않겠나
뭐 이런 이야기 아니였을까 추측이 된다.
당시엔 절실한 마음에서 한 이야기이다.
전태일 기념 사업의 하나로 정동 프란치스코에서 포럼을 할 때
참석하신 홍세화선생님이 전태일의 사망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청계천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 시간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몇일 전에 화계사 사거리에서 넘어진 아저씨는 일으켜 드렸을뿐인데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셨다. 인쇄소에서 화상을 당해 괴로워하고 있을 때
코리아헤럴드 고 대리가 연민하며 응급처치라도 하라고 돌봐주던 생각이
난다. 사촌 형님 사업장에서 일하다 다쳤는데 왜 괴로운 줄도 모르고
어쩔 줄 모를 때 걱정해준 것만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집에 가서 몇 일
괴로워 악을 썼다.
국가인권위원회 8층에서 한참 방송민영화와 신방겸영 종편출범을
막기 위해 애쓸 때 정부의 민영화정책과 세습언론의 언론지배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해
토론할 때 참석했다가 패널로 참석한 김창룡교수를 방문진 김우룡으로 잘ㅌ못알고
조중동과 인터뷰하지 말라고 했는데 토론회끝나고 미디어오늘 안진숙기자에게 물어
김창룡교수에게 전화로 사과했지만 두고 두고 부끄럽다.
내 발언으로 윤상현?교수는 제자가 책을 던진 일화를 말했었고
이후로도 나만 보면 극단적인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다.
당시엔 언론계에서 나름 신망이 있고 한 역할을 담당하신 분들이 참석했는데
내발언으로 김창룡교수는 인터뷰한 일이 없다고 밝히셨고
결과적으로 토론회를 진영을 경직되게 만들었다.
조중동을 축으로 재편되는 일만은 기어코 막으려는 마음에 옛날 일이
떠올라 한 말이다. 당시 중앙일보와 한계례 신문을 비교모니터리하고
있었는데 조선 동아도 모니터했지만 중앙일보가 앞도적인 양으로
신방겸영의 당위성을 보도했다. 매일 지면에서 중앙일보 스피커대변인으로
인용되며 스피커노릇을 하는 김우룡이 양쪽 진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참석한 줄 알고 이참에 조중동이 어떻게 경영하며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심각하게 받아들여달라고 한 말인데 얼굴을 본적이 없다보니 순간 김우룡과
김창룡을 혼동했다. 발언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해서
곧바로 확인해보니 패널로 참석하신분은 인제대 김창룡교수였다.
발언중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다. 나에게 조선일보와 신문일은
그런 것이다. 떠올리면 눈물이다. 하지만 내가 추구했던 것 해 온 일은
그런 것이 아닌데 극단적인 사람으로 인상지어졌다.
여기 저기 안 다닌 데가 없기 때문에 당시 아는 사람이 많았다.
얼마전 동투위기념식에 오신 윤교수는 아직도 그때 일을 떠올리시는 것 같았다.
눈물이 진주라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사람들은 알아만 주어도 스스로 치유한다.
손가락을 자르고, 자해하고 찌르고 찔리던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도
알아주기만해도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생존본능보다 강한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노력 눈물 아픔을
몰라주는 정부를 욕하는 사람들은
성찰이 필요하다. 지식과 육체로 익히는 것은 다르다.
오후 4시 반에 도봉사까지 걸어갔다 왔다.
부추호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