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세월호 인양 뉴스 보니까
문득 기억의 뻘 속에 파묻힌 슬픔이 떠올랐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시신을 보지 못하면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이를 떠나 보내기까지
강 같은 슬픔이 모래를 쓸고 흐르고 흘러도
그래도 떠나보내질 못할 텐데
어쩌냐 그래도 살아야지
내가 고3 때 어느날 갑자기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엄마를 32살이 돼서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어느 새벽 달팽이 눈깔 두개가 발에 밟히던 꿈을 꾸고 난 뒤
사촌누나에게서 비보가 왔다
엄마는 성주군 수륜면 소재지에 있는
형제원에 잠시 계셨는데
그 해 여름방학 때 거기에 계시기로 했다고 해서 형제원에 갔었다 이제
일년만 있으면 엄마와 같이 살 수 있다고
연락처를 남기고 왔다
엄마의 사망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내려갔다
당시 고등학생이지만 돈을 잘 벌었다
조선일보배달을 했는데 배달을 세 구역하고
일욜이면 하루에 많을 땐 19집씩 확장을 했다
그런데 내려가니 엄마의 산소도 알 수 없고
엄마가 거기 계셨다는 기록도 흔적도 없었다
형제원은 당시 대구에 소재하는 세모라는 법인이 운영하는 고아양로복지시설이라고했다
연락처를 적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보모를 찾았지만 보모도 없다고 했다
말못하시는 귀머거리 묘지기 아저씨가 묘지를 알려주셨지만 긴가민가 했다
한방에 계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들 께서 사고로 눈을 다쳤는데 치료를 하지 않아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형제원이 조직적으로 나에겐 어떤 정보도 주지 않겠구나 생각했지만
형제원의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생의 목표인 엄마가 죽자 목표가 사라졌다
그래서 한동안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엄마의 흔적을 찾았다
세월호참사 뉴스를 보고 세모라는 이름이 기억났다
이번 참사와 관련이 있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죽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던 엄마를 꿈속에서 떠나보내기까지 12년이 흘렀다
이 후 법인이 할렐루야로 바뀐 후에 엄마사진을 찾던중 기거 기록은 확인했고 사망원인은 알아보지 않았다
그 후 묘지 진위를 확인하던 중 사망 당시 모른다던 젊은 원장이
형제원 근처에서 토종오리음식점을 한다는 얘길듣고 찾아가 보았었고
최근 식당에서 함께 일하시던 여인이
그 보모가 아니였을까하는 추측이 문득 떠올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