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4일 오전 01:46
9월 13일
10시에 깨어 밥먹고 나니 12시였다.어제 저녁은
8시에 먹어 먹고나니 12시였다.
밥먹고 결심한 대로 산으로 갔다.
2시에 출발하여 우이암 갔다오니 8시였다.
오랜만에 가니 조금 더 걸린 것 같다.
산에 가니 좋았다.침침하던 시야도 좀 밝아지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햇빛을 보니 좋았다.
산에서 고려인3세인 러시아 여성을 만났는데
우이암에서 돌아오는 길에 까마귀사진을 찍으려고 바위에 올랐는데
사진찍어줄까요 물었다. 말투가 나 같아서 처음엔 장애가 있나 싶었는데
언뜻 연변쪽 외국인 같았다. 어디출신인가 물어보니 고려인 3세인데 모스코에서
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싸이베리아출신이라고 했다. 인천에서 와서 서둘러 내려가야 하는데
보문능선으로 올라와서 보문능선으로 내려갔다. 보문능선엔 계단이 많아서 우이암으로 내려올래다가
말동무나 할까 하고 같이 내려갈랬는데 먼저 가길래 무수골로 내려왔다.
내 걸음으로 가면 늦었거나 혼자가고 싶었을 것 같다.
착한 여성같았다.
집에 와 칼국수를 끓였다. 이번에도 면이 불었다.
미리 야채 준비가 된 상태에서 면을 데쳐서 멸치육수에 넣고 함께 끓여봐야겠다.
제로마트와 K마트 가서 각각 제일 싼 것 1만 원씩 샀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꽁치캔 카놀라유 부침가루 등
곰표부침튀김가루가 천원인데 유통기한이 한달도 안 남았다.
밀가루 2킬로가 있고 부침가루 2봉지나 사서 한봉지만 샀다.
이제 차례지내기까지 하루 남았는데 집치우고 장보고 다 할 수 있을까?
힘들것 같다. 잘하면 이번엔 제사 못 지낼 것 같다.
다음 정부에 대한 기대
2000년대부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다음 정부는 통계정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어딘가에 기록해두었을지도 모른다.
군관민일체정부(군사정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다음엔 통계정부 현재(현실)와 미래를 통찰하는 정부
미래의 유인을 예측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정부
예측가능한 사회의 기반이 될 통계를 작성하고
통계를 중시하는 정부 통계를 남겨 사회불안요소를 줄이는 정부
정부와 타인 외인과 내인에 대한 통찰이 두려움을 감소시키고
안정적인 신뢰관계를 형성 가능하게 하는 정부
문제의 진단 대책 수립이 즉각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정부.
인구문제 15년 이상 지속되면 안 된다. 특단에 조치가 필요하다.
출산인구가 적다면 다산으로 해결해야 한다.
국립대학진학을 무료로 보장해준다던지 특별한 혜택이라도 내 놔서 일단 발등의 불을 꺼야한다.
세대별 평균 60만~70만명을 유지해줘야한다.
낳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해치지 않고 남의 재물을 빼앗지 않으며
반 사회적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자면 키우는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키우는 사람이 제공하는 노동력에 국가공동체가 보답을 하는 것이다.
반사회적인 인물
법 민법 형법 사회법
성비
군대문화와 성비
남아선호(유교문화:가문족보)와 성비
전쟁과 성비
식민지와 성비
남존여비사상은 언제 어떤 이유로 생겼을까? 식민지 남존여비 사회에서 여성의 성비가 압도적으로 높다.
남자가 적다.
군대문화(군사정권)과 성비
군부정권이 들어선 60년 101.9%에서 60~90년 사이 남아의 성비가 정점 114%를 찍고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성비가 정확히 남녀100%씩 동일한 것은 49년이고 50년 100.2%다.
세계2차대전인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성비는 31년
60:100으로 여아의 성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성비는 자연발생적으로 1:1일 텐데 기형적인 이유는 전쟁과 징집때문이었을까?
징집때문에 남자를 여자로 바꿨을까?
31년 여성에 비해 남성이 60.5%이던 성비는 점점 올라서 50년이 되어서야 1:1이 되었다.
50년부터 60년까지 102%의 비율을 보이던 성비는
군부정권이 들어선 60년부터 10년 단위로 2%계속 올르다가 80년부터 가파르게 오르더니 90년 114.2% 94년 114.7%를 찍는다.
군부정권의 마지막과 6월항쟁을 거쳐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 정정을 찍은 것이다.
군대문화 군부정권(독재)과 성비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
성비의 불균형에 여러 유인이 있지만 성비의 불균형 추세가 군사정권시기에 비례관계에 있는 것이 흥미롭다.
군인이 남자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유교문화가 지배하던 시기 가문(씨앗)을 있는다는 사상보다
훨씬 영향력이 컸던 것 같다. 심지어 남존여비 사상까지 만연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남자로 상징되는 힘 권력 돈이 출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2002년 저출산 고령화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 제대로 대처했으면 좋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15년간 저출산이 진행되었는데 또 15년간 진행된다면 심각한
사회파국이 예상된다. 즉 아직까지 15년 사이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데
더이상은 아닌 것 같다. 다출산으로 바꿔야 한다. 한명당 출산시마다 2천만 원 정도 주면
적당할 것 같다. 물론 낳아서 성년이 될때까지 양육을 책임진다는 전제하에서
그 양육노동인건비를 지급하는 것이다. 키워놓으면 자산이다.
10대가 무분별하게 출산하는 것은 양육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라 지급하면 안 된다.
어짜피 양육의 비용은 국가공동체가 부담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기르면 더 좋다.
참고 통계청에 가보자 아직 가보지 않았다.
연도별 출생아 수
연도별 인구분포
연도별 인구
연도별 인구수
인구분포 성비
연도별 출생아 수
1954년생 : 680,000명
1955년생 : 702,000명
1956년생 : 711,500명
1957년생 : 723,900명
1958년생 : 758,000명
1959년생 : 784,100명
1961년생 : 804,000명
1962년생 : 858,700명
1963년생 : 877,890명
1964년생 : 901,300명
1965년생 : 925,000명
1966년생 : 953,120명
1967년생 : 986,400명
1969년생 : 1,005,000명
1970년생 : 1,006,645명
1971년생 : 1,024,773명
1972년생 : 952,780명
1973년생 : 965,521명
1974년생 : 922,823명
1975년생 : 874,030명
1976년생 : 796,331명
1978년생 : 750,728명
1979년생 : 862,669명
1980년생 : 862,835명
1981년생 : 867,409명
1982년생 : 848,312명
1984년생 : 674,793명
1985년생 : 655,489명
1986년생 : 636,019명
1987년생 : 623,831명
1988년생 : 633,092명
1989년생 : 639,431명
1990년생 : 649,738명
1992년생 : 730,678명
1993년생 : 715,826명
1995년생 : 715,020명
1996년생 : 691,226명
1997년생 : 668,344명
1998년생 : 634,790명
1999년생 : 614,233명
2001년생 : 554,895명
2002년생 : 492,111명
2003년생 : 490,543명
2005년생 : 435,031명
2006년생 : 448,153명
2011년생 : 471,265명
2012년생 : 484,3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