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5일 오전 04:34
7월 24일 일요일
어느새 24일이구나.
아침에 늦게 일어나 오토바이를 타고 교회에 갔다왔다.
교회갔다와 5시까지 쉬다가 텃밭에 갔다왔다.
텃밭에서 나와 무수골 산책했다. 비온 뒤라 계곡에 물이 많아 가족끼리
피서하기 딱 좋아보였다.
집에 와 밥먹고 누워 휴대폰으로 9시 뉴스보다가 잠들었다.
다큐3일 보다가 일어나 목욕하고 빨래를 했다.
빨래를 티 1개만 빨려고 했는데 새로 사서 입고 벗어둔 난닝구에 검은 곰팡이가
잔뜩 난 것을 보고 하나 하나 빨다보니 꽤 빨았다. 씻고 자려고 1시 40분까지 멍하니 버티다가
목욕하고 바로 자려고 했는데 빨래하다보니 4시다. 생각해보니 5월부터 빨래를 하지 않았다.
속옷들은 무사할까 걱정이다. 빨래더미 속에.
성주
나에겐 대를 이어 한이 서린 애수의 도시 마을이다.
내 어렷을 때 꿈은 경공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초등2학년 때부터 학교 육상선수를 했는데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색색소리를 꼬맹이때부터 좋아했다.
그래서 아침 신문배달을 할 때도 남들 다 오토바이 자전거로 했지만
난 뛰어서 배달을 했다. 한때 파랑새는 있다라는 드라마가 할 때
미친듯이 좋아서 푹빠져서 드라마를 보았었다. 내 속의 꿈과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솔샘길 성암여상 들어가는 길가에 있는 향문독서실에서 중3을
숙식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 때 수배중이던 운동권 형들이
날 많이 챙겨주었다. 생각해보니까 사랑을 많이 받았구나.
생라면이던 뭐던 먹을 걸 챙겨주던 승뭐 형도 있었고
서울대와 단국대를 두번다닌 독서실주인 실장님도 있었다.
수배중이던 중앙대 광희형이 내가 경기상고에 수석합격하고도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니까 자기 고모부가 하는
정문인쇄소란 곳에 날 소개시켜줬다. 그렇게
86년 겨울부터 87년은 남대문 을지로 서울역 신길동에서 살았다.
광희형은 학생이니까 세상물정을 몰라 나에게 좋은 조건을 말해줬지만
실재는 악몽같은 생활이었다. 그것이 운동권과 리얼한 바닥인생을
견뎌내야하는 나의 차이를 체감하는 시작이였는지 모른다.
독서실에서 시간날 때 형들과 사회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많이 들었다. 어릴 때라 아 그렇구나 했다. 얘기의 중요 화두는
우리나라 경제가 박정희 때문에 잘 되었냐였다. 형들은
박정희 아니라도 사계절이 뚜렸하고 근면하고 똑똑한 우리의 민족성이
우리경제를 발전시켰을 것이라고 했다.
광희형이 소개시켜준 고모부집에서 기숙하며 인쇄소 생활을 시작했는데.
매일 영업이 끝나면 12시까지 고모부 되는 정문인쇄소 사장은
남대문에서 미니족발을 날 시켜 하나 사놓고 자정 버스 끊길 때까지
친구 영재란 분과 시국이야기를 했다. 피곤하고 어린 내입장에선
맨날 한 얘기 뭘 저렇게 할 이야기가 많을까 싶었지만 두분은 서로 자신의
우위를 겨누며 서로 논리로 지지 않으려 싸우면서 자신의 분석이 옳다고
자기가 똑똑하다고 어때 나의 분석이 하며 끝없이 이야기했는데
이야기 소재가 끊이지 않는 것은 사장이 동아일보를 한자도 빼놓지 않고 다
보기 때문이었다. 난 빨리 가고 싶은데 사장과 함께 들어가야하기 때문에
그 지겨운 이야기를 듣기 싫어도 들어야했다.
덕분에 서울역앞에서 대모가 있을 땐 대모 대오의 맨 앞에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맨날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어릴 땐 재미있었다.
사장이 장성인가 장흥분이신데 광산김씨에 덕분에 훗날 대통령 김대중야당 시국강연회가 있는 곳이면
가게 문 닫고 사장과 보라매공원이던 부천이던 경기도 어디라도 인파가 우글거리는 가생이 한자락에 끼여
재수좋으면 젤 앞에서 강연과 규탄을 들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편이다란 말을
습관처럼 타인에게 되뇌고 다녔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나의 재능과 통해있고 이어져있었는데 내가 그 재능을 맨 마지막에 살리지 못했다.
인쇄대행소에서 을지로에 버스를 타고가 사식 도안 동판을 처리하고 지업사에서 종이를 사서 인쇄소에 갖다주고
을지로에서 일볼 동안 인쇄를 끝내서 가지고 가게로 돌아가는 반복이었다. 인쇄할 동안 명함에 들어갈 각 기업
로고 동판을 뜨고 인쇄 재료를 사고 명함조판할 때 필요한 활자를 식자라고 하는데 식자를 사고 청첩장 등을
사고나면 주문한 인쇄가 끝나있었다. 불과 한 두시간안에 그 많은 일을 다 처리했다. 일의 순서를 잘 잡고
인쇄소의 타이밍을 잘 잡아야 했다. 내가 종이를 주자마자 바로 판 걸어 인쇄할 수 있게 해야 일볼동안 인쇄가 끝난다.
인쇄소 누나 형 사장님들이 일을 맡기면 바로 바로 해줘서 일처리가 빨랐다.
정문인쇄소에선 사람을 나 하나만 썼기 때문에 을지로 일도 봐야하지만
남대문 인근의 무역주식회사들이나 기업들이 의뢰하는 복사카피를 바로 바로 해서 갖다 줘야 한다.
단골 고객이기 때문에 직원처럼 콜하면 총알같이 달려가서 일감을 가져와 복사하고 원본과 함게 가져다준다.
번개처럼 뛰어야 한다. 정산은 월말에 하고 주요단골은 주로 무역회사였다. L/C 송장 복사가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국제화재해상빌딩 23층에 있던 삼환양행이었는데 사장과 누나들이 날 이쁘게 봐서
훗날 무역회사 사환으로 직업을 바꾸었다. 인쇄소보다 몇 배 좋았다.
중3때 입시가 치열해서 예비시험을 거의 매일보다시피했는데 그 시험지를 내가 편집했다.
완벽주의 때문에 선생님은 대충하라고 했지만 난 기출문제집과 똑같은 간격으로 문제를 오려 편집했다.
선생님이 수십권의 문제집을 사서주면 매 회당 여러장에 걸쳐 있는 문제를 한장에 편집하면 되는데
문제집처럼 편집하려니 정밀하게 계산하고 오려야하기 때문에 밤을 새웠다.
국어와 한문책은 한권의 편집광 교본을 만들었었다.
그러다가 인쇄소에 갔으니 인쇄소에서도 삐딱한 것이 있으면 똑바로 잡고 정리하고 정렬을 했기 때문에
단골 회사에서 좋아했다. 송장 카피본들이 정신없이 카피하다보면 삐뚤빼뚤이고 토너잉크를
아끼다보면 흐릿하기 쉽상인데 난 항상 바르게하고 흐릿한 건 또렷하게 카피했다.
덕분에 무역회사에 스카우트되었다.
그리고 88년 인문계영훈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학비를 벌고 숙식을 해결하려니 할 것이
신문배달밖에 없었다.
그렇게 신문업과 인연을 맺었다.
매일 매일 뛰어배달하다보니 엄청나게 체력이 단련되었다.
나중엔 경공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이제 조금만 하면 완성하겠다 싶을 때
성주에 수륜면 형제원에 계시던 엄마가 돌아가셨다.
거기서 내 꿈이 틀어지고 깨지고 인생이 바뀌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슬픔이 너무 커서 사인을 케지 못했다.
평생 남의 눈치만 보고 주눅든 인생을 살아서였을까 왜
엄마의 사인을 파고 들지 못했을까?
바닥에서 부딪힌 인생의 경험은 내가 켈 수 없는 무게의
문제라고 본능적으로 가르쳐주었는지 모른다.
한없이 비를 맞고 한정도 없이 몇 달을 쏘 다녔다.
성주정거장 비오는 날 플렛폼 웅덩이에 이지러진 버스불빛들을
잊지 못한다. 나에게 성주시외버스정류장은 거리마다 불빛이
흐느끼듯 우는 밤이란 강인한의 여정이란 가사처럼
빗물웅덩이에 어린 슬픔들을 차마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어렷을 때 그 곳에서 엄마가 이별을 했기 때문이다.
엄마와 작별할 때면 늘 슬펐다. 버스정류장 매표소에
표팔던 예쁜 아가씨도 생각난다.
내 친구들은 노래방에서 내가 왜 그렇게 강인한의 여정이란 노래를 악을
쓰며 불렀는지 모를 것이다. 이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노래도 부를 수 없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조선일보신문배달을 하며 다녔는데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내가
강권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조선일보를 보았다.
학교선생님부터 친구 친척까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월말이면 수금을 나갔는데
신문수금날엔 확장이 많을 땐 19부씩 나왔다.
나의 조선일보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은 참
대단했다. 훗날 한겨레를 배달할 땐 우연히 만난
채수창 서장도 한겨레를 구독했다.
나와 신문이야기를 하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신문을 보게 되어 있다.
고객이나 타인 독자에게 무엇인가 내가 팔고자하는
상품을 말할 땐 내가 정말 먹어보고 읽어보고
경험해보고 내 판단을 말해야한다.
요즘도 무엇제품에 관심이 꽃히면 같은제품을 소개하는 여러매체의
기사를 읽어본 후에 더 신뢰가 가는 매체의 기사를 스크랩하듯이
기사를 비교해보고 무엇보다 종합적으로 내가 팔 신문을 정독해보고
정말 더 좋을 때 어떤 점이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객과 타인을 위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호의를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신문한부 봐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이제품이 정말 좋고 어떤 점이 좋고 좋기 때문에 권하는 것이지
어떤 제품인지도 모르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홍보를 하고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려고 애썼던
조선일보가 알고보니 국민과 민중을 기만하고 그 위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심지어 억압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아이러니다. 지금은조선일보의 반대편에 있는 내가 민언련 회원이고 한겨레 신문도 배달했었었고 하였지만
그땐 한겨레 신문의 주장과 이념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그 사실도 모르고 충성을 다한 것이다.
열정과 시간을 바쳤다.
남들은 신문배달만 하면 그만이지만 내겐 신문지국이 거주할만큼 위생적이고 식사가 잘 나오고
직원 후생복지가 잘 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햇다. 조선일보가 그런면에서 낫지 않았다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를 앞서지 못했을 것이다. 내겐 그것이 인생의 의미였다.
어찌보면 나와 상관없는 일을 내 스스로 내일을 만들어 이 세계와 우주가 내 의지대로 변하게 만든 것이다.
이 세상은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중요한 인생의 원칙을 세웠고 깨닫고
육체를 단련했다.
그때 스크랩하고 읽은 기사들은 이후 출판사에 취직해서 일하는데 모두도움이 되었다.
모든 주제에 대한 나의 관심과 기사를 통해 분석했던 각 문제의 현상 원인들에 대한 주관은
출판일을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온 파랑새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나에겐 이게
천직인줄 알고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직업을 막상 가지고선 놀았다.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딴 짓만 했다. 그 때 출판의 기초 소양을 잘 다져두었더라면
내가 갖고 있는 어학실력과 인생경험 세계관 기획력과 맞물려
이세상을 이롭게 하는 무수한 책들을 펴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시절부터 하나의 천직을 향해 부단히 경험과 실력이 쌓이고 있었는데
눈에 콩깍지가 씌여 30대를 허비해버렸다.
성주
형제원에서 사고사를 당한 엄마의 죽음이 은폐되고
내 인생도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는데
훗날 찾아가서 그 때의 진상을 알아보다보니
그 때 원장은 지금은 할렐루야기도원으로 바뀐 그곳 근처에서
토종오리탕집을 하고 그때 그 보모는 원장의 부인이 된 것처럼
추측이 되었다.
원장옆의 이쁜 주방담당 부인이 아마 그때 내가 찾던 그 보모였던 것 같다.
엄마는 성주에서 태어나고 성주 대가초등학교를 나오셨는데
첫결혼에 실패하고 나은 아이 둘 마져 계모에 의해 죽었다고 했다.
가슴에 한이 맺히 화병을 다스리지 못했다.
엄마의 소꼽친구 남자분이 한 동네에 아직 살고 계셨다.
엄마에 대해 우호적인 몇 안되는 분이시다.
엄마의 조카도 있었고 엄마의 형제도 살아 있었다.
중산리에 있는 엄마의 둘째형제 이모집에만 난 내왕했다.
엄마는 딸 형제만 있었다. 엄마의 부모님중 아버지는 약초를 케서
생활하셨는데 할머니에게 아들을 낳으라고 요구하시고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어렵게 낳은 아들 둘이 그만 옥련리마을앞
연못에 빠져 죽고 엄마 아버지의 폭력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엄마는 남자에게 지지 않으려했고 대들다가 맞는 것을 어릴 적
많이 보았다. 그때마다 너무 안타까워 울었다. 그래서
여자패는 남자들을 어릴 땐 무척 싫어했다.
그 모든 일들이 성주에서 벌어졌다.
난 훗날 직업이 안정되면 40대에 이모든 것에 대한 자료를 뒷바침해서
엄마를 주제로 책을 쓰려고 했다. 그만큼 엄마의 인생은 기구했고
엄마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그 시대상이 그대로 배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뇌졸중을 당하고 산재도 보상받지 못하고보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일만 하염없이 기다린다. 불안에 떨면서.
문득 목욕하다가 성주가 생각나서 무엇인가 기록하고 싶었는데
빨래하다보니 이야기가 엉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