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희망버스
2차 희망버스
이 많은 사람이 모두 김진숙을 살리겠다고 김진숙에게 희망을 전하겠다고 김진숙을 응원하겠다고 그래서 한진중공업의 불법해고를 시정하겠다고 모였다. 전국각지에서 온 대다수의 사람은 나처럼 김진숙에게 자신들의마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이 전부가 아니였을까 생각된다. 그렇지만 권력을 쥔 특정 언론은 외부세력, 종북세력 불순세력이라 매도한다. 일인당 오고가고 최저 경비만도 5만 원은 넘는다. 영도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다. 매도하는 당신들은 당신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우면서 누구를 위해 단 돈 만 원이라도 적선해본 적이 있는가?
비와 경찰의 최루액까지 맞으며 밤을 꼴딱 세우고 그 이튿날 해가 질 때까지 죄없이 구속된 구속자의 석방을 기다려 본 적 있는가? 아마 일신에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있거나 반대로 영리가 있는 곳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이곳엔 영리도 없고, 다음 일주일을 시달려야 하는 불이익만 있지만 1만 명이 모였다. 김진숙에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김진숙을 통해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그런 효과가 날 수는 있겠으나 여기 모인 사람들은 순수했기에 젖은 신발로 밤을 새우고 다시 따가운 햇빛아래서 한 낮을 버틸 수 있었다. 프리즘에 꺽이지 않고 나와 다른 타인이 희망사항을 희망사항그대로 볼 수있도록, 희망사항이 타인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드는 길 만이 이 고생에서 면하는 첩경(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동정과 유대 연대는 인간의 자연스런 법칙일 뿐이다. 모든 법이 이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강자가 만든 법의 잘못이 드러나면 겨우 그것을 시정하는 전횡과 독재를 막는 그래서 사회를 최소한 안전하게 유지는 할 수 있도록 타협한 산물이 법아닌가? 양심이 있다면. 약자들이 만나고 교류하고 공감하는 것을 막아선 안된다. 그것은 법에 명시되어 있고 최소한의 도리이기 때문에.지금은 18,19세기 혁명시기도 혼돈시기도 아니다. 왜 그 때를 핑계로 그 때의 잣대로 사회안녕을 핑계로 약자를 짓밟는가? 인간은 정치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리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 보면 불편하고 갇잖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이고 문화적이고 커뮤니케이션(상호교감, 의사통감) 적이고 정신적이고 물질적이다. 모든 것의 위에 정치가 있지 않다. 그리 주장할 사람도 없겠지만 간혹 과거 독재에 맞섰던 8~90년대의 경험에서 그리 주장하시는 분도 계시다. 인간이 인간을 짓밟고 숙청해야만 혁명이 새로운 사회가 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365일 전쟁만 해야 한다.보이지 않는 전쟁이든 파탄내는 전쟁이든. 그리 살 수 없기에 부산에 모였다. 우리의 정성과 성의 간절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권력이 니 삶을 옥죄는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권력이 언제나 나를 향해서만 있나? 때론 반대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평범한 한 사람의 주체 개인이 역사도 바꾸고 사회도 바꾸기도 한다. 먼저 신의를 저버리고 지속적으로 약속을 어기는 모습을 보아왔기에 불신이 팽배하고 상대를 믿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리 살면 인생이 괴롭다. 세상모두와 맞서야 하기 때문에 .운명에 고통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내주었다는 것은 한번뿐인 인생의 변명으로 빈약하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과 주변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 극복의 방법이 처단과 숙청이 아닌 설득과 타협, 사랑이여야(사랑을 목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인생이 쉽지 않다. 나와 다른이와
함께 살아야 하기때문에. 한나라당을 맹신하는 사람이라도. 깊은 생각 없이 그냥 스스로 자문자답해봤다. 박원순 변호사 말처럼
권력은 정부에만 있지 않고 시민사회에도 개인에도 있다. 권력보다 상식이 훨씬 무섭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인간의 마음은 움직인다.
사회의 권력은 스스로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편한 것 같다. 내가 언제나 권력의 피해자로 약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은 복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아무튼 선출된 권력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횡포를 막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우선 과제 같다. 어쩌면 과거에도 그러했을지 모른다. 왕조보다 왕조에 빌붙어 국민을 괴롭히는. 그렇다면 왕조체제, 시장주의 체제자체를 전복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왕조체제에도 시장주의체제에도 인간의 일반적 삶의 형태 본질이 그대로 있기에 그것을 보고 즉 인간의 본성 사회의 본성을 보고 바람직한 해법을 찾는 것과 현 체제의 부작용, 단편만 보고 전복하려는 것은 그 결과가 다를 것 같다.
만인에 대한 사랑이냐 만인에 대한 투쟁이냐로 결론이 날 것 같다. 한쪽은 동지를 믿고 한쪽은 동지도 믿지 못하게 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불신 경계 증오 때문이다. 남녀간의 사랑처럼 상대의 부족함을 알고도 차라리 속는 것이 , 속아 주는 것이 행복한지도 모른다. 왜 여기에 이땅에 왔을까? 우리는? 그래봤자 미숙한 한 인간이다. 나의 미숙함을 인정할 때 세상살기가 편해지는 측면도 있다. 왜 이렇게 중언부언할까 아마도 함께 촛불드는 몇몇 분들이 떠올라서 인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내 생각이 옳다는 생각, 전제는 없음을 알고 봐주셨으면 좋겠다. 혹시 누가 본다면. 공부가 짧아서.